뵘바베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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뵘바베르크

뵘바베르크


뵘바베르크(Eugen von Böhm-Bawerk, 1851~1914)

Roger W. Garrison (배진영 역)

 

"노동자는 자신의 몫을 자본 희생으로 증가시킬 수 없다."

 

뵘바베르크는 1851212일 태어나서 1914년에 죽었다. 그는 적절한 시점과 장소에서 오스트리안 경제학 발전에 중요하게 기여했다. 그는 빈(Vienna) 대학교에서 공부했다. 1871년 칼 멩거(Carl Menger)경제학 원리(Principles of Econpomics)’가 출판되었을 때, 그의 나이 20살이었다. 대학교에서 그의 공식적인 전공은 법학이었다. 그래서 그는 실제 멩거의 학생은 아니었다. 그러나 1875년 그가 법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그는 스스로 국내외에서 오스트리아 언어로 경제학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법학과 경제학의 병행(竝行)은 그의 대학동기이며 후에 그와 의형제를 맺은 비저(Friedrich von Wieser)의 경력도 마찬가지였다. 비저는 1893년 발간된 자연적 가치(Natural Value)’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뵘바베르크 사고에 끼친 멩거의 강력한 영향력과 평생 동료였던 비저와의 관계는 그를 자연스럽게 오스트리안 이론을 개진하고 발전시키도록 했다. 슘페터(Joseph Schumpeter)의 판단에 의하면, “뵘바베르크는 철저하게 멩거의 열광적인 추종자였다. 멩거 외의 그 누구에 의해서도 거의 영향을 받지 않은 듯하다.”

 

그러나 학자로서의 뵘바베르크 경력은 지속적이지 못하다. 학자로서 가장 왕성하게 활동한 기간은 인스부르크(Innsbruck) 대학교 재직기간(1881-1889)이었다. 그의 대표작인 자본과 이자(Capital and Interest)’ 3권 중 2권이 1880년대 발간되었다. 그의 후년(後年)은 대체로 오스트리아 재무장관(Austrian Minister of Finance)의 봉직으로 채워졌다. 1890년대(연속적이지는 않지만)와 그 후까지 재무장관을 지냈다. 그는 오스트리아 100 실링(schilling) 지폐에 그의 초상화가 들어가면서, 그의 오랜 봉직에 대한 명예를 정당하게 얻게 되었다. 국가에 대한 그의 봉직을 마친 후, 그는 1904년 강단으로 돌아왔다. 빈 대학교의 석좌교수로서 그는 은퇴한 멩거의 계승자였던 비저의 동료교수가 되었다. 뵘바베르크의 경력과 삶의 마지막(그는 1914년에 죽었다) 10년 동안 빈 대학교를 거쳐 간 학생들에는 슘페터(Joseph Schumpeter)와 미제스(Ludwig von Mises)가 있었다.

 

1,200 페이지의 자본과 이자(Capital and Interest)’1959년 센홀즈(Hans Sennholz)와 헝케(George Huncke)에 의해 번역되었고 이를 한 권의 책으로 출판되었다. 이 번역본에서 미제스는 이 기념비적 저서현대 경제이론에 가장 뛰어난 기여라고 평했다. 미제스는 그 누구도 이 책에서 전개되고 있는 개념들에 완전히 익숙해지지 않으면 스스로 경제학자라고 주장할 수 없다고 했다. 미제스는 이에 더 나아가 시민으로서의 의무를 다하는 시민이라면 그가 뵘바베르크의 책을 읽지 않고서는 그의 권리를 행사하지 말아야 함을 심각하게 고려해야 한다고 까지 제안했다!

 

자본과 이자의 첫 권은 이자 이론의 역사와 비판(History and Critique of Interest Theories)’이라는 이름으로 출판되었다. 그 책은 이자의 특성에 관한 여러 모색들을 아주 광범위하게 탐구했다. , 사용 이론(use theories), 생산성 이론(productivity theories), 금욕 이론(abstinence theories), 기타 등등이 그것이다. 이 책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마르크스(Karl Marx)와 그에게 영향을 미친 자들에 의해 받아들여진 착취론(exploitation theory)을 괴멸시킬 정도의 비판을 가했다는 점이다. 자본가는 노동자를 착취하지 않는다. 자본가는 생산요소로서 노동자가 기여한 산출물이 생산되고 판매되기 전에 그에게 소득을 제공함으로써 그를 생활할 수 있게 한다. 10 여년 뒤, 뵘바베르크는 사회주의자들에 의해 제기된 문제들을 다시 반박해야 했다. ‘카를 마르크스와 그의 시스템의 종말(Karl Marx and the Close of His System)’은 소득이 생산요소들 간에 어떻게 분배되는가에 관한 문제는 정치적 논의 사안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경제적 논의 대상임을 확립했다. 그리고 오스트리안의 대답은 노동가치론과 소위 임금의 강철 법칙(iron law of wages)’을 효과적으로 반박했다.

 

뵘바베르크의 자본과 이자(Capital and Interest)’의 제2권은 실증적 자본이론 (Positive Theory of Capital, 1889)’이라는 이름으로 출판되었다. 이 책은 경제적으로 시간이 걸리는 생산 과정과 여기에 수반되는 이자 지불에 관한 이해에 가장 실질적이고 심도 있는 기여를 했다. 이 책은 이보다 더 많은 것을 제공한다. 3권의 책에서 그가 다룬 가치와 가격(Value and Price)’은 멩거의 경제학 원리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것은 오스트리안들이 한계주의를 어떻게 설명하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 책 143쪽에서 농부가 곡식자루를 다양한 용처에 그 자신을 위해, 그의 병아리를 위해, 그의 앵무새를 위해, 주정용 재료를 위해- 어떻게 배분하는지에 관한 뵘바베르크의 뛰어난 논의를 읽을 수 있다. 오스트리안 한계주의의 정수는 농부가 곡식 한 자루의 상실을 고통스러워한다면 (앵무새를 인식하고) 어떤 일이 일어날지에 관한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이 이야기와 이 이야기의 변형들은 그 후 수십 년에 걸쳐 교과서에서 수없이 설명되어 왔다. 오스트리안 한계주의는 제본스(William Stanley Jevons)의 한계주의에서 유도되는 2차 미분의 총-효용 함수와 왈라스(Léon Walras)의 일반균형 방정식과는 아주 다르다.

 

2권의 세 번째 교정판에 있는 부록이 자본과 이자에 관한 추가적인 에세이들(Further Essays on Capital and Interest)’이라는 이름의 제3권으로 분리되어 1921년 출판되었다. 뵘바베르크는 이 책에서 그의 이론을 보다 더 명료하게 하고, 질적으로 개선하며 확장한다. 그러면서 그는 그의 비판에 대응한다. 많은 내용을 담고 있는 이 에세이들은 저자의 학문적이고 수사학적인 방법들에 관한 많은 것을 드러내 보인다. 뵘바베르크는 경제학자처럼 논리적이고 법률가처럼 논쟁한다. 그의 가장 신랄한 비판은 그의 이론과 아주 유사한 이론들에 대한 것이다. 예를 들어 이자율이 기다림(waiting)’의 수요와 공급을 균형으로 이끈다고 하는 구스타브 카셀(Gustav Cassel)의 이론을 단호히 거부하였다. 오스트리아학파가 방법론적인 문제에 관심을 가진다고 알려져 있지만, 뵘바베르크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는 전면적인(no-holds-barred) 접근을 취했다. 슘페터는 다음과 같은 암묵적인 격언을 분명히 말한다. “방법에 대해서는 거의 또는 전혀 쓰지 말라, 그 대신 가능한 모든 방법들을 동원해 더욱 더 에너지 넘치게 일하라.”

 

현대 경제학은, 중간재의 시간적 구조라는 의미에서, 자본에 무관심한 것으로 악명 높다. 생산에는 시간이 걸린다. 여러 기간이 소요되는 생산의 계획 수립과 소비자 수요의 만족을 분리시키는 시간은 자본에 의해 이어지게 된다. 현대 교과서에서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경제 현실의 이 측면은 가시 같은 자본 문제로 소개된다. ‘가시 같은 자본은 치명적으로 중요한 주제를 경멸적으로 처리함을 경고하는 폭로적인 구절이다. 그것은 주류 경제학의 빈틈이지만, 오스트리안 경제학은 거의 처음부터 자본 이론에 관한한 특별한 탁월함을 지녔다. 모든 가시들을 완전히 깨달은 뵘바베르크는 그의 학문적 경력을 자본과 이자의 관계를 이해하고 가치 이론을 시간배분의 관계까지 확장하려는 목표를 달성하는 데 집중했다.

 

그의 경력 초기, 뵘바베르크는 그의 동료들과 그보다 앞선 학자들에 의해 많이 논의된 다음과 같은 핵심 질문에 집중했다. “이자를 자본 소유자들에게 지불하는 것이 정당한가?” 그는 그것의 정당성은 다음과 같은 현실의 단순한 사실에 있다고 생각했다: 동일한 수량과 질이라면 사람들은 미래재보다 현재재에 더 많은 가치를 부여한다. 미래재는 할인되어 거래된다. 반대로 말하면, 현재재는 프리미엄을 붙여 거래된다. 이자 지불은 바로 이 시간적 가치의 차이를 반영한 것이다. 이 이자 또는 프리미엄이 자본가에게 지불되며, 이것이 노동자들로 하여금 그렇지 않을 경우에 비해 좀 더 시간적인 고려에 기반을 두고서 소득을 받게 해준다. 뵘바베르크의 프리미엄 이론의 대척점에 있는 착취 이론에 대한 이 이론의 함의는 의심의 여지없이 경제사상사 전문가들의 평가에서 뵘바베르크의 손을 들어주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그것과 함께 그는 새로운 장을 열었다. 그것은 그가 사회주의 원리에 대한 그의 명성을 자본주의 체제를 새롭게 이해하는 데로 확장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의 실증 이론 (Positive Theory)’은 일반균형의 거시경제 모델에서 절정을 이룬다. 그의 모델은 자본축적과 기술진보에 관한 고전적 이슈를 규명하고, 이자율의 존재와 그것의 결정에 관한 신고전학파의 문제를 해결하며, 그 외의 더 많은 것을 수행하기 위한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은 점을 보여주기 위해 그의 프리미엄 이자 이론에 멩거의 한계가치 이론을 결합했다. 시장 임금률이 주어지면 이윤을 극대화 하려는 자본가-기업가는 생산 활동을 통해 노동력을 완전히 고용할 뿐만 아니라 경제의 생존기금(subsistence fund)을 완전히 흡수한다. 아주 근본적인 초기의 오스트리안 통찰력을 이용하고 경제 전반의 관점을 취하면서, 뵘바베르크는 시간적 생산구조를 노동자와 기타 소득취득자의 시간적 선호를 연결했다. 거의 반세기 이후 케인즈(John Maynard Keynes)일반이론(General Theory)’에서 이와는 정반대의 주장을 했다. ‘실증 이론(Positive Theory)’은 노동시장과 대부자금시장(좀 더 넓게 말하면, 생존시장)이 동시에 각각의 균형을 달성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우리는 뵘바베르크가 거시경제학자였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우리가 스스로 뒤돌아 볼 때 그렇다는 것이다. 되돌아보면 현대적 개념이 없던 시절 고전파 경제학자들은, 특히 리카르도(Ricardo)는 거시경제학자로 간주될 수 있다. ‘거시경제학이라는 실제 단어는 비교적 최근에 사용된 것이다. 사무엘슨(Paul Samuelson)은 미시경제학(microeconomics)과 거시경제학(macroeconomics)1차적 구분의 기반 위에서 경제학 문제를 인식했다. 사무엘슨은 이 구분을 프리스(Ragnar Frisch)와 틴버겐(Jan Tinbergen)으로 추적하고 그 용어의 첫 인쇄물 등장을 1939년 린달(Erik Lindahl)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이보다 더 앞서서 1891년 뵘바베르크의 에세이인 오스트리안 경제학자들(The Austrian Economists)’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누구도 발전한 경제의 거시세계(macrocosm)를 잘 이해하려면 미시세계(microcosm)를 공부하지 않을 수 없다.” 절제된 이 방법론적 격언에는 거시경제를 이해하려는 그의 바람과 동시에 미시경제의 기반은 생명력 있는 거시경제학을 위한 필수라는 그의 인식이 담겨 있다. 주류 경제학은 겨우 1960년대 중반에 가서야 그의 이런 견해를 펼치고 있다.

 

자본과 이자의 거시경제학을 설명하기 위해, 뵘바베르크는 황소 눈 고리를 도입했다. 황소 눈 그림은 생산의 시간 구조를 묘사하기 위해 그려진 원 모양이다. 생산은 원의 중앙에서 시작하며 거기에는 본원적 수단(토지와 노동)만을 사용한다. 그 과정은 시간이 지나면서 외부로 퍼져나간다. 소비자의 궁극적인 목표를 충족시키기 위한 최종 생산물은 원의 가장 바깥쪽에서 생산된다. 이어진 페이지에 그려진 두 개의 황소 눈 그림은 선진국 경제와 후진국 경제를 대조적으로 보여준다. 뵘바베르크의 이런 색다른 묘사는 선구적인 업적이다. 하이에크(F. A. Hayek)는 양 대전(大戰) 사이의 기간에 수단-목표의 구도를 보다 직설적으로 묘사하기 위하여 뵘바베르크와 유사한 그림을 도입하였다. 하이에크 삼각형(Hayekian triangle)은 직선으로 생산구조의 핵심을 설명한다. 하이에크는 비선형의 중요성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시간 축에 따라 생산 단계(stages of production)’를 나누는 삼각형은 반지름에 따라 성숙 정도(maturity classes)’를 나누는 황소 눈의 그림에 바로 해당한다.

 

더 잘 알려진 하이에크 삼각형과 마찬가지로 황소 눈 그림도 비록 정태적일지라도, 그것은 변화의 분석을 용이하게 할 목적으로 도입된 것이다. 다양한 원들 간의 자원배분을 지배하는 시장 힘의 본질은 무엇인가? 뵘바베르크의 분석 형식은 그 형식은 단순한 그림과 약간의 산술적 묘사이다- 독자로 하여금 그림 이해(getting the picture)’에 도움을 준다. 그러나 그 그림 이해는 뵘바베르크가 전하는 전체 이야기의 서곡에 불과하다.

 

그의 이야기는 변화 과정의 본질에 관해 형식을 갖추지 않으면서 분석한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을 정태적 묘사라고 말할 수 없다. 정태적 상태의 경우, 동심원은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해석된다. (1) 생산과정은 초기의 요소투입에서 최종 산출물 까지 시간이 걸리면서 진행된다. (2) 원의 면적은 주어진 시점에 존재하는 여러 종류의 자본(과정에 있는 재화) 량을 나타낸다. 그러나 정태적 상태의 묘사는 변화에 관한 논의의 출발점에 불과하다.

 

뵘바베르크는 짤막하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떠올렸다. “직전의 자본량을 그대로 유지하길 희망한다면, 그 절차는 무엇인가?” 이에 대한 그의 대답은 더 중요한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이어지게 했다. “자본 증대가 있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이 질문은 오스트리안 거시경제학을 오늘날의 주류 거시경제학과 구분 짓는 핵심적인 질문이다. 이에 대한 답은 동심원 모양의 변화에 있다. 여러 형태의 변화들이 제시되지만, 그 각각은 모두 다음과 같은 생각을 담고 있다: 실질저축은 소비의 희생과 원의 중심에서 보다 바깥쪽에 있는 자본의 희생에 의해서만 얻을 수 있고 저축은 원의 중심에 가까이 있는 자본의 확대를 가능하게 한다. 시장경제에서 기업가들이 이런 구조 변화를 가져오게 하며 그들의 노력은 다양한 원들 속에 있는 자본재의 상대가격 변화를 이끈다고 뵘바베르크는 지적한다.

 

형식을 갖추었든지 그렇지 않든지 간에, 그가 전하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자본구조의 확대는 제품의 각 성숙 정도에 있는 자본을 동시에 그리고 동일한 비율로 증대시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자본이 여러 성숙 정도 사이로 재 배분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의 선임자들은 이를 간과했으며 현대 주류 경제학자들도 대체로 이를 무시한다. 이것은 시간 사이의 생산 계획을 시간 사이의 소비자선호와 맞추려는 시장 기능이다. 이런 시장기능의 중요성은 그가 클라크(John B. Clark)와 논쟁할 때 핵심 주제였다. 클라크는 일단 자본이 설치되면 자본 유지는 자동적으로 되며 생산과 소비는 사실상 동시에 일어난다고 주장했다. 오늘날의 독자(讀者)들은 뵘바베르크가 그 논쟁에서 이겼으며 후에 하이에크가 나이트(Frank Knight)와의 논쟁에서도 이와 유사하게 승리했다고 결론 내릴지 모른다. 그러나 주류 거시경제학의 발전은 승자는 클라크와 나이트임을 은연중에 내비치고 있다.

 

현대 오스트리안 경제학자들은 뵘바베르크가 오스트리안 경기변동 이론에서 딱 한 발자국 멀리 떨어져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쉽다. 미제스와 하이에크도 이 한 발자국을 실제로 받아들였다. 그렇지만 이 한 발자국은 선호에 의해 야기된 변화인지 아니면 정책에 의해 초래된 변화인지 이에 따른 고리 모양 변화의 비교를 포함했을지 모른다. 저축 증대를 이끈 시간에 따른 선호의 변화는 경제가 자본축적과 지속 가능한 성장을 경험하도록 자본을 원들 사이로 재배분한다. 그러나 정책에 의해 야기된 신용 조건의 변화는, 즉 새롭게 주입된 화폐 대여에 의해 만들어진 이자율 인하는 경제가 지속 가능하지 않는 성장과 경제위기를 경험하도록 자본을 원들 사이로 잘못 배분한다.

 

뵘바베르크는 그의 이론을 다음과 같은 단순한 이유로 더 이상 발전시키지 못했다. 그는 스스로 화폐이론을 탐구하려는 모험을 하지 않았다. 이 주제를 향한 그의 태도는 스웨덴 경제학자인 빅셀(Knut Wicksell)에게 보낸 편지에 드러나 있다. 시장이자율과 자연이자율의 격차에 관한 빅셀의 아이디어는 오스트리안 이론의 중요한 일부가 되었다. 1907년 뵘바베르크가 빅셀에게 보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나는 내 스스로 학자로서 화폐 문제에 관해 생각하지 않았거나 이에 대해 탐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나는 이 주제에 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1912년의 편지에는 당신은 내가 너무나 어려운 화폐 이론에 관해 능력 있다고 정말로 느끼지 못함을 알고 있다.”

 

1912년 또한 뵘바베르크는 미제스가 처음으로 오스트리안 경기변동 이론이라고 명명한 미제스의 화폐와 신용 이론(The Theory of Money and Credit)’을 언급하면서 빅셀에게 빈의 젊은 학자인 미제스의 화폐 이론 책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한다. “미제스는 나와 비저(Wieser) 교수의 학생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내가 그의 모든 견해들에 책임 있고 싶어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나는 지금 막 그의 책을 읽기 시작했지만, 그 책의 내용은 아직 저에게 낯설군요.” 마지막으로 그가 죽기 직전 해인 1913년에 나는 아직 나의 사고 주제 속에 화폐 이론을 포함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 책이 제기하고 있는 어려운 질문들에 대한 판단 내리기를 주저하고 있습니다.”

 

슘페터는 뵘바베르크가 그의 연구 과제에서 제외한 일반 주제 5 가지를 열거했는데, 그 중 하나가 화폐였다. 뵘바베르크는 수량이론(quantity theory)에서 불멸의 진실 핵심을 받아들였으나, 화폐는 베일에 싸여있다는 생각을 가졌다. 두 번째로 제외된 영역은 돌아 보건데 첫 번째의 쌍둥이라 할 수 있는 경기변동 이론이었다. 뵘바베르크는 경제위기를 내재적이거나 일률적인 경제현상이 아니라 원칙적으로 경제과정의 우연한 교란의 결과라는 입장을 취했다. (제외된 다른 세 가지 영역은 인구, 국제무역, 그리고 가격과 분배 이론의 응용이다.)

 

5 가지 누락의 죄에 대해 우리는 뵘바베르크를 쉽게 용서할 수 있다. 심오한 사색가가 위대한 도약을 성취한다면, 우리는 그 도약이 더 위대하지 못했다고 불평할 자격은 없다. 그 대신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아야 한다: 미제스, 하이에크 그리고 다른 여러 사람들에 의해 도약은 계속될 것이고 이것이 뵘바베르크를 더욱 위대하게 보이도록 할 것이다.

 

뵘바베르크 경제학에 관한 초기와 현대 문헌들은 그의 많은 잘못도 지적하고 있다. 많은 비판은 오스트리아학파에서 나온다. 그의 이론은 불충분하게 주관주의적이라는 것이다. 이자의 프리미엄 이론에 대한 그의 방어는 필요 없이 심리적인 생각에 기대었다. 그의 생산시간 고려는 미래 지향이 아니라 과거 지향이었다. 오스트리아학파 외부에서의 비판은 주로 뵘바베르크의 산술적 묘사에 관한 부당한 지적과 신고전파 이론의 언어로 그의 이론을 다시 설명하려는 시도에서 나온다. 이자율과 생산과정의 우회정도와의 관계에 관한 그의 결론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그를 믿게 할 정도는 아니다. 자본의 경제시간적인 구조는 단 하나의 숫자로 환원될 수 없다. 개념적으로 평균 생산기간이 이자율에 달려 있다는 것은 그의 이론의 많은 부분을 무효로 만들었다. 다행히도 이런 비판과 그 외의 다른 많은 비판들은 뵘바베르크에게 그리고 오스트리안 이론의 미래 발전에 중요한 핵심 아이디어를 손상시키지는 않고 있다.

 

슘페터와 같은 출중한 경제학자도 이자는 불균형 현상이라고 주장했으며 그는 시장의 힘이 이자율을 영(zero)으로 까지 압박하는 곳에서 장기 균형이 달성된다고 했다. 케인즈는 이자란 순수하게 화폐현상이라고 보았다. 클라크의 뒤를 이은 나이트(Frank Knight)는 하이에크가 자본의 신화(mythology of capital)’라고 부른 것을 창조해내면서 생산과 소비는 동시에 일어나고 생산기간은 무시해도 되며 이자율은 전적으로 기술적 고려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했다. 자본과 이자에 관한 20세기의 이런 저런 왜곡과 반전이 뵘바베르크의 지혜를 더욱 빛나게 하고 그 중요성을 더욱 크게 했다.

 

저자) Roger W. Garrison: 현재 Auburn University의 경제학과 명예교수 겸 Mises InstituteAssociate Scholar. Auburn University에서 1978~2012년 동안 거시경제학과 경제사상사 강의, 2001Smith Prize in Austrian Economics 수상, 2003London School of Economics에서 First Hayek Visiting Scholar라는 칭호를 얻음. 2004Society for the Development of Austrian Economics 회장 역임

역자) 배진영: 인제대 국제경상학부 교수

원문) https://mises.org/profile/eugen-von-böhm-bawe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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