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에크
하이에크 (Friedrich August von Hayek, 1899~1992)
김행범
“물질적 지위의 평등 요구는 전체주의 정부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하이에크는 1899년 5월 8일 오스트리아 비엔나의 명문 카톨릭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1차 대전 참전 후 비엔나 대학 법학부에 입학하여 오스트리아 학파를 창시한 칼 멩거(C. Menger)와 프리드리히 비저(F. Wieser)를 만난다. 당시 비엔나 대학은 스톡홀름과 캠브리지와 더불어 경제학을 공부의 삼대 최적지로 알려져 있었다. 이들과의 만남은 하이에크가 오스트리아 경제학파의 사상을 확대하고 심화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 후 1921년에는 박사과정에 입학하여 법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게 되는데, 이때 오스트리아 정부의 전쟁부채 처리기관에서 일하면서 그의 학문적 인생에 대 전환점을 가져온 중요한 학자를 만나게 된다. 그는 바로 루트비히 폰 미제스(Ludwig von Mises)이다. 1923년부터 하이에크는 미제스의 사설세미나에 참석하면서 경제학의 지평을 넓히게 되었고, 이를 통해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을 정립하게 된다. 미제스와의 만남은 하이에크의 학문적 삶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는데, 무엇보다 하이에크가 대학시절 가졌던 친사회주의 성향에서 자유주의로 전향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1927년 하이에크는 미제스와 함께 오스트리아 경기변동연구소를 설립하였고, 그 결과 하이에크의 중요한 업적 중 하나인 「화폐이론과 경기순환론(1929)」을 발간하게 된다. 1930년대 하이에크는 또한 미제스와 더불어 사회주의 경제 계산에 반대하는 논쟁을 펼쳤다. 특히, 케인스의 거시경제학적 고용이론과 화폐이론에 관해 논쟁을 벌였다. 그는 당시 지식이론을 개발하고 이를 기반으로 하여 사유재산권이 없는 사회주의에서 합리적 경제 계산은 불가능하며, 이러한 계획 경제는 반드시 실패하고 만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케인스식 거시 경제학의 급속한 유행으로 인해 하이에크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30년대 이후 서구 사회의 지성은 사회주의가 지배했다. 자유주의와 시장경제는 모든 악의 근원으로 여겨지고 이런 체제를 극복하거나 수정해야 한다는 여론이 지배적인 시기였다. 아예 공산혁명으로 반(反)시장경제로 되거나, 공산혁명을 피한 서구는 전체주의로 되어 가거나, 자유의 전통이 깊은 영국에서 조차 사회주의 요소를 흡수하고 있었다. 이러한 추세에 대항하기 위해 나온 「노예의 길」(1944)에서 하이에크는 사회주의의 허구를 파헤치며 사회주의를 추구하는 국가들은 완벽한 세상을 만들겠다는 유혹에 빠져 종국에는 수많은 사람의 자유를 희생시키는 길로 나가게 된다고 주장했다. 즉, ‘그들이 유토피아로 여기는 것은 자유로 가는 길이 아닌 노예로 가는 지름길’이라는 것이다. 그의 열정은 더 나아가 자유주의 결사체를 만드는 데까지 이르게 된다. 1947년 하이에크는 36명의 자유주의 학자들과 더불어 스위스의 몽펠르랭에서 ‘몽펠르랭소사이어티(MPS)’를 창립했다. 이 MPS는 사회주의와 정부 개입주의에 맞서 자유주의의 가치를 지키고 이를 전파하는 세계적인 학회로 성장하게 된다.
자유주의에 대한 그의 선구자적 업적과 활동은 현실 정치의 방향에도 큰 방향을 제시했다. 영미나 서구의 개혁의 정당성과 방향을 제시했으며, 냉전시대에는 좌파의 물결을 차단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그리고 구소련과 동유럽 국가가 시장경제로 개혁하기 위한 길을 닦아 놓았다. 1970년대 서구 복지국가가 복지병과 경기침체 현상을 앓게 되면서 자유시장 중시와 계획 경제 비판을 요체로 한 그의 이론이 재조명되었고, 1980년대 레이거노믹스와 대처리즘을 필두로 하는 신자유주의 출현의 이념적 기반이 되었다.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 마가렛 대처 영국 총리는 시장의 자율성을 중시하는 신자유주의 정책을 적극적으로 채택했다. 마가렛 대처는 하이에크야말로 우리가 나가야 할 길이라고 선언하기까지 했다. 영국은 자유주의의 개발과 영국의 성공적인 개혁에 기여한 공로로 1985년 하이에크에게 명예훈장(Companion of Honour)을 수여했고, 1991년 미국 레이건 대통령은 자유메달(Presidential Medal of Freedom)을 수여했다.
하이에크를 세계적 학자로 알린 「노예의 길」(The Road to Selfdom, 1944)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사소한 일시적 안전을 얻으려고 본질적 자유를 포기하는 사람은 자유와 안전, 그 어느 것도 누릴 자격이 없다.” 그는 자유주의의 방어적 이론가에 머무르지 않았고 자유의 투쟁가이기도 했다. 1947년 하이에크는 미제스(Mises), 로빈스(Robins) 및 밀턴 프리드먼(Milton Friedman) 등 36명의 자유주의 학자들과 더불어 ‘몽펠르랭 소사이어티(Mont Pelerin Society)’를 창립하면서 사회주의 사상에 대한 이념 전쟁을 선포하였다. 그는 ‘자유주의자가 사회주의자들로부터 배워야 할 것이 있다면 그들의 사상을 실제로 세상에 구현하려고 했던 이상주의자(Utopian)가 될 수 있는 용기’라며, 사회주의로 편향된 지식인들로부터 자유주의를 구하기 위해 이념전쟁에 참여할 것을 호소하였다.
그의 마지막 저서 「치명적 자만」(The Fatal Conceit)이다. 여기서 유토피아를 꿈꾸는 사회주의는 지적으로는 허세를, 도덕적으로는 위선을 부리며 우리를 노예의 길로 안내하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하이에크는 자신이 비판했던 사회주의가 몰락함을 직접 확인한 후 1992년 독일 프라이부르크에서 93세를 일기로 영면할 수 있었던 행복한 학자이기도 했다. 사회주의는 비효율적이 아니라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며 그것은 결국 무너질 수밖에 없다고 설파했다. 카탈락시로서의 시장, 경기변동이론, 분산된 지식, 자생적 질서, 자본재의 가치에 관한 ‘하이에크의 삼각형’, 법의 지배 이론 등은 그의 탁월한 천재성을 보여준 핵심 개념들이다.
그의 주요 저술로는 “자유의 헌법”(Constitution of Liberty, 1960), “법, 입법 그리고 자유 (Law, Legislation and Liberty, vol.1: 규칙과 질서, 1973; vol.2: 사회정의라는 허상, 1976; vol.3: 자유인의 정치 질서, 1979), “치명적 자만”(The Fatal Conceit: The Errors of Socialism, 1988) 등이 있다. 1945년에 쓴 논문 “사회 속의 지식의 사용”(The Use of Knowledge in Society)은 미국 최고 경제학술지 American Economic Review이 선정한 100년 동안의 최고논문 20편에 선정되었다. 가장 유명한 “노예의 길”(The Road to Serfdom, 1974)의 최근래 한글 번역본은 김이석 박사의 책(노예의 길, 2006, 나남출판)이다.
Reference
민경국(2007). 하이에크 자유의 길. 한울
https://en.wikipedia.org/wiki/Friedrich_Hayek
https://mises.org/profile/friedrich-haye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