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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아니었으나 사회주의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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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작성일18-09-13 15:32 조회1,31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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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아니었으나 사회주의자들이었다 

Jörg Guido Hülsmann, 2018. 08. 28 (김행범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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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주의 혁명가들이 1차 대전 후 사실상 비참하게 패배하자 그들은 자신들이 사회 진보의 선구자라는 이미지에 큰 손상을 입었다. 


미제스(Mises), 막스 웨버(Max Weber) 및 보리스 브루츠쿠수(Boris Brutzkus)의 저작 속에서 왜 이러한 실패가 나타났는가에 대한 설명들이 나오자 많은 경제학자들은  정부가 사회 안에서 차지할 적정한 범주에 관해 그들의 관점을 수정하게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회개하지 않은 채 전체주의 국가의 옹호자로 남아 있었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사회주의자들의 주장들 중 단지 평등주의라는 정책의제 요소만을 내 버렸다. 


이 집단의 두말할 바 없는 리더는 1차 및 2차 대전 사이 독일 경제학자들 중 가장 대단한 스타였던 좀바르트(Werner Sombart)였다. 좀바르트는 그의 1896년 책인 『19세기의 사회주의 및 사회 운동』(Sozialismus und soziale Bewegung im 19. Jahrhundert)를 통해 그의 학문 공동체 안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유행시키는 것으로 자신의 경력을 시작했었다.1 나중에 나타난 판(版)들은 좀바르트가 그가 초기에 가졌던 마르크스주의 이상에서 점점 멀어져 갔음을 보여준다.2 좀바르트는 주류인 슈몰러식 사회주의로 돌아갔는데(역주: 슈몰러 Schmoller는 국가가 국민 경제의 통일자, 전체 목적의 구현자, 사회정책의 초계급적 주체라고 본 이른바 ‘강단 사회주의’의 대표학자) 그것은 마르크스주의에서 평등주의라는 요소를 빼고 전체주의 국가를 옹호하는 것이었다.3 


좀바르트의 지적 자질은 걸출했다. 대부분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마르크스 및 엥겔스를 도그마로 붙잡고 있을 때 좀바르트는 객관성을 추구하는 철저한 비판적 마음으로 그들의 가르침을 분석하고 발전시키고자 했다. 이 때문에 그의 연구들은 마르크스 사회주의에 반대하는 지적 조류의 철저한 비판 표적이 되었고, 미제스는 “반(反)마르크스주의”(Antimarxismus)란 논문에서 그런 비판을 가했다.4


미제스는 이미 ‘가격통제’에 관한 그의 논문에서, 간섭주의의 결함은 몇몇 정부들이 추구했던 평등주의적 정책의제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정부 간섭 자체의 본질로부터, 즉 그것이 사유재산권을 침해한다는 점으로부터 나오는 것임을 지적했었다. 사회주의 및 간섭주의는 그게 명백히 평등주의적인 것이든 아니든 간에 파괴적인 경제 제도들이다. 그것들은, 비록 그것이 분배에 관한 어떤 다른 이상(理想)을, 심지어 능력주의(meritocracy)를 추구한다 할지라도, 부적절한 형태의 사회 조직이다. 전체주의 국가에 의해 통제되면서도 평등주의적이지 않은(non-egalitarian) 사회와 자유 사회 간에는 겉으로는 어떤 유사성이 있을지 모르지만 이 둘은 본질적으로 여전히 다를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국가주의’(etatism)의 사회적 이상은 자본주의의 사회적 질서와 차이가 없다. 국가주의는 전통적인 법질서를 뒤집지 않으며 공식적으로는 생산 속 모든 사유재산권을 공적 재산권으로 바꾸지도 않는다. .... 그러나 실제로는 모든 기업들은 정부가 운영하게 된다. 이런 실태 하에서는 재산소유자들은 재산에 대한 명의와 상표는 지니면서도 권리는 “적절한”(appropriate) 혹은 “그들의 직급에 부합되는”(befitting their ranks) 소득에 대해서만 갖게 된다. 모든 기업들이 정부의 사무소가 되고 공무원이 모두의 직업이 된다. .... 가격은 정부에 의해 설정되고 무엇을 어떻게 어느 양만큼 생산할지는 정부가 결정한다. “투기”(speculation)도, “엄청난”(extraordinary) 이윤도, 또 손실도 없다(*역주: 한국에서 ‘투기’를 부도덕한 의미로 해석함은 잘못 굳어진 언어 용례이다. 여기서의 진정한 의미는 높은 불확실성을 감수하며 큰 돈 벌 기회에 자본을 투입하는 것이다). 혁신을 하라고 정부로부터 지시받는 경우가 아니라면 혁신(innovation)은 존재하지 않는다. 정부가 모든 걸 지도하고 감독한다.”5


미제스는 전능한 국가(omnipotent state)라는 관념의 오류는 그 국가의 특정 정책 의제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음을 보여주었다. 만일 정부의 목표가 개인들의 단순 총합과는 반대되는 의미로서의 “집단적 삶”(collective life)을 개선 증진하는 것이라면 거기에 대해 정부는 전능하지 않다. 또 개개 시민들 총합(totality)의 후생을 증진하는 것이 목표라면 그 경우에도 전능하지 않다. 어느 경우든 정부는 반(反)생산적이다. 따라서 옛날부터 중요하다고 여겨져 온 개인주의와 집단주의의 구분은 단지 부차적인 의미밖에 없게 된다. 가장 중요한 구분은 효과가 나는 정책(policies that work) 및 그러지 못한 정책(policies that do not work)인데, 그것은 곧 사유재산권에 토대를 둔 사회질서(효과가 나는 것)와 사유재산권 침해에 토대를 두고 있는 사회질서(효과가 나지 않는 것)의 구분으로 이어진다. 따라서 집합체 속 모든 개인들에게 사유재산권이 주어지기만 한다면, 경제를 개인이 운영하는가 혹은 집합체가 운영하는가는 중요한 사항이 아니다. 그것은 기업의 크기 또한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유재산권이 존중되는 한, 소비자가 내리는 구매의 의사결정은 가장 좋은 제품을 공급하는 기업에게만 보상을 줄 것이다. 그 기업이 다른 기업들에 비해 큰 규모의 기업이 될 수도 있다.6  


미제스는 이러한 점을 강조하면서 두 세계대전 사이의 시기 및 이차대전 후 독일의 정치사상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던 디첼(Heinrich Dietzel), 프리브람(Karl Pribram) 및 슈판(Othmar Spann)의 교리에 맞섰다. 디첼과 프리브람은 개인주의 편에, 슈판은 집단주의 편에 가담했지만 모두 다 개인주의-집단주의가 최종적인 범주이고 여기로부터 모든 정치적 관점들이 나오는 것으로 보는 점은 같았다.7 미제스는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개인주의로부터도 나오는 것도 또 집단주의로부터도 나오는 것도 아닌 관점, 즉 공리주의적(utilitarian) 사회 분석이란 방법이 있다고 주장했다.8 


그는 이미 언어 공동체(language communities)와 같은 사회 “전체”(wholes)의 정태적 및 동태적 문제들을 분석하는데 이 방법이 얼마나 성공적인가를 증명했으며, 전체를 그런 식으로 분석하는 것이야말로 이론적 사회과학의 요체라고 강조했다.9 개인의 행동이 보다 넓은 사회적 맥락을 떠나서도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은 오류이며, 사회 전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회 분석 자체가 신비주의적(holistic)이어야 한다는 것 또한 오류이다(역주: 분석 단위와 관련된 방법론적 시각에서 ‘방법론적 개체주의’-methodological individualism-는 개체 혹은 개인을 분석하면 집단 전체를 설명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며, 이에 비해 ‘신비주의’- holism-는 집단 자체에 고유한 속성이 따로 있으며 그것은 개체로 환원될 수 없다고 본다. ‘오스트리아 학파’ 및 ‘공공선택학파’는 방법론적 개체주의를, 정치학 및 행정학의 ‘체제학파’는 신비주의를 채택한다. 전자는 모든 것을 개체로 환원하다보면 심리학주의로 빠질 위험이, 또 후자는 자칫 집단 혹은 집합체를 유기체로 볼 위험성이 지적되고 있다.)  


공리주의적 방법 자체는 진정으로 과학적인 것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사회 현상에 대해 과연 그것들이 경험적 사실인가라는 점을 검토하는 것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공리주의적 사회 교의는 형이상학에는 관여하지 않으며, 모든 살아있는 존재들은 자신들이 생존하고 성장할 의지를 천명하고 있다는 확립된 사실을 그 출발점으로 삼는다. 노동의 생산성이 고립된 행위일 경우와 비교할 때 분업 속에서 수행된 경우에 더 높다면, 그 높은 생산성은 개인들을 점점 더 결합체로 묶어간다. 사회란 노동의 분업이고 노동의 결합이다.”10

  

누구나 자신의 후생을 증진하고자 하며, 협력적 노동은 고립된 노동보다 더 생산적이다. 따라서 개인의 후생 증가가 더 많은 물질적 재화를 의미하는 이상, 개인은 분업에 참여함으로써 자신의 목표를 가장 잘 달성할 수 있다. 사회는 이렇게 생겨난다. 


사회에 대한 이러한 경제학적 설명 속 모든 요소들은 확인될 수 있는 사실이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개인주의 및 집단주의라는 교리는 사회의 생성 근원에 대한 그러한 인과적 설명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데, 이는 그것들이 사실의 분석보다는 가정에 토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미제스는 이와 동일한 비판이 마르크스의 프롤레타리아 계급 갈등(class struggle)에도 적용됨을 보여주는데 까지 나아갔다. 그는 인간의 역사가 수많은 집단 갈등들로 특징지어지며 또 그것들이 흔히 사건들의 전개에 큰 영향을 미쳤음은 부인하지 않았다. 오히려 미제스는 당시 유행하던 투쟁이론(struggle theory)들은 -마르크스의 계급투쟁 이론도 그것의 한 특별한 예일 뿐이다– 실제 이상으로 과장되었다고 주장했다. 집단 갈등들이 인간 삶의 근본 요소들인 것은 아니며 아마 그럴 수도 없을 것이다. 진정한 질문은 어떤 한 집단이 어떻게 애초에 존재하게 되었는가? 이다. 집단들 간의 투쟁을 설명하기 전에 집단이 어떻게 형성되었는가를 먼저 설명했어야 했다. 그러나 마르크스 이론을 포함해 모든 투쟁이론들은 이를 정면으로 다루지 못했다. 


이를 무시한 이유를 추적하는 건 어렵지 않다. 집합체 내부에서만 존재하지만 그 집단을 벗어나서는 효력이 없는 어떤 결사의 원리를 보여주는 것은 불가능하다. 만약 전쟁 및 분쟁이 모든 사회 발전의 동력이라면, 왜 이것이 계급, 인종 및 나라 간에만 타당하고 모든 개인들 간 전쟁에서는 타당하지 않은가? 만약 우리가 이러한 전쟁사회학(war sociology)을 취하여 논리적 결론으로까지 끌고 간다면, 우리는 개인들 사이에 “사회 교제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론”(a theory of nonsociability) 외에는 어떤 사회적 교리에도 도달하지 못한다.11


미제스는 마르크스의 계급투쟁 이론이 그것의 가장 기초적 개념을 경험적으로 설명하는 것조차 실패했다고 지적했다. 마르크스가 의미하는 “계급”(class)이란 무엇인가? 마르크스는 결코 그걸 정의한 적이 없다. “또 그의 사후에 발견된 자본론의 세 번째 책의 원고가 계급을 다루게 되어 있던 곳에서 갑자기 중단된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미제스는 논의를 계속해 갔다.


“그가 죽은 후 사십년이 지났으며, 계급투쟁은 현대 독일 사회학의 초석이 되어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것의 과학적 정의 및 서술을 계속 기다리고 있다. 계급이란 개념만이 아니다. 계급 이익(class interests), 계급 상태(class conditions), 계급 전쟁(class war)은 물론이고 상태(conditions), 계급 이익(class interests) 및 계급 이념(class ideology) 개념들 간의 관계성의 모호함 또한 결코 그보다 덜하지 않다.”12 


베르너 좀바르트는 그가 논란의 여지없는 지도자로 있었던 독일 사회학자들 대부분과 함께 프롤레타리아 계급 투쟁이 현대 사회를 움직이는 종국적인 동력이라는 시각을 받아들였다. 그는 후에 마르크스 이념의 반대자가 되었지만 그의 분석들은 여전히 마르크스주의적이다. 마르크스 및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늘 계급 갈등이론으로부터 모든 실질적 결론을 연역해 낸 것에 비하여, 좀바르트는 단지 그것을 좀 자제할 뿐이다. 그는 사회 진화에 관하여 마르크스식 시나리오에 대한 대안을 제공하지 못했으며 또 그럴 수도 없었다. 마르크스에 대한 그의 유일한 반대는 가정(假定 postulate)의 형태로 나타났다: 계급투쟁 이론대로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되니 따라서 정부는 그렇게 전개되지 않도록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역주: 즉 좀바르트는 마르크스의 이론대로 역사가 전개된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인정함으로써 좀바르트 및 독일 사회학자 대부분은 과학의 영역을 다시금 벗어나 종교와 윤리의 영역으로 들어 간 것이다. 좀바르트는 사실상 중세적 형태의 사회 조직 즉 길드(guild)로 돌아 갈 것을 옹호했다. 이는 영국의 케인즈가 자신의 제안이 “중세적 관념의 별단의 자율체제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a return, it may be said, towards medieval conceptions of separate autonomies)고 한 것과 똑 같다13(역주: 케인즈는 사적 이윤에 맞서는 사회주의의 전투가 매일 승리하고 있다고 하면서 이것은 사회 진화의 자연적 모습이라고 보았다. 그리하여 그는 대기업을 규제해야 할 악으로 보고 그 대안으로 중세 길드처럼 통제받는 별도의 경제체제를 제안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마르크스의 계급투쟁 관념을 철저히 비판했었던 슈판(Othmar Spann)과 같은 몇몇 이론가들도 중세 시대의 국가사회주의(national socialism)의 축복이라고 알려진 것들에 놀라움을 표시했다. 


미제스는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모든 과학적 사상가들에게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반대할만한 점은 그의 이론 부분인데, 반(反)마르크스주의자라는 좀바르트에게는 그런 이론 부분이 거슬리지 않는 것 같다. .... 반(反) 마르크스주의자라는 좀바르트는 단지 마르크스식 제도의 정치적 증세들에 대해 반대했을 뿐이지 그 과학적 내용에 반대한 것이 아니었다(역주: 좀바르트는 계속해서 마르크스를 ‘과학의 사람-man of science-’이라고 인정했다). 그는 마르크스의 정책들이 독일 국민에 가한 해악에 대해 유감스럽게 여길 뿐이고, 마르크스식의 문제 및 해결책이 가진 상투성과 결함이 독일 지식계에 끼친 해악에 대해서는 눈감고 있다. 무엇보다도 그는 정치적 및 경제적 문제들은 이러한 지적 재앙의 결과임을 깨닫지 못한다. 그는 모든 하루하루의 삶에 미치는 과학의 중요성을 인정하지 않으며, 또 그는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을 받아서 사상(idea)이 아니라 “현실의”(real) 힘이 역사를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믿는다.”14


미제스의 “반(反)마르크스주의”(Anti-Marxism)는 마르크스주의자들 사이에서 분노를 일으켰다. 미제스의 죄과는 무엇이었던가? 첫째, 그는 마르크스의 계급 투쟁이론의 치유할 수 없는 결점을 꿰뚫어 보는 분석을 통해 대가라는 마르크스를 감히 비판했던 것이다, 둘째, 그는 경제학적 관점에서 볼 때 마르크스의 사회주의는 1920년대에 대개 마르크스주의 운동에 대한 반발로 튀어나오기 시작했던 ‘국가사회주의’의 새로운 여러 브랜드들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다시금 주장했던 것이다. 그래서 마르크스의 가르침을 거부하고 스스로를 “파시스트”(Facists)라 칭했던 이탈리아 사회주의의 한 분파가 일어나 베니토 무솔리니의 리더십 아래 권력을 장악했었다. 또 독일에서는 비(非)마르크스주의자에 의한 “국가사회주의”(National Socialists) 운동이 있었다. 이 운동의 아버지는 프리드리히 나우만(Friedrich Naumann)이었는데 기이한 우연의 일치로 그는 나중에는 20세기 독일 자유주의의 대부(代父)로 간주되었다.15 (역주: 목사 출신인 프리드리히 나우만은 기독교 사회주의 활동가였으며 독일 제국주의의 침략 이데올로기에도 일조했다. ‘국민사회주의’를 제창하였으며 나중에는 좌파적 자유주의 활동에도 참여하였고 그의 이름을 딴 재단이 설립되어 있으며 북한에도 지원을 보내고 있다). 1920년대부터 그 비참한 종말까지 국가사회주의 지도자는 물론 아돌프 히틀러였다. 


마르크스 사회주의자들은 그들이 파시스트 사회주의자 및 국가 사회주의자들과 같은 이름으로 분류되는 것에 대해 요란스럽게 반대한다. 그러나 미제스가 보여주었듯이, 이 집단들 간의 모든 차이점은 표면적인 것일 뿐이다. 경제학적으로는 그들은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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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좀바르트가 나타나기 전에는 독일 대학들은 마르크스의 저술들을 아주 비판적으로 받아들였으며, 미국에서도 좀바르트 보다 약 45년 후 조셉 슘페터가 그의 저서 『자본주의, 사회주의 및 민주주의』(1942)에서 마르크스를 중요한 사상가로 유행시키기 전까지는 학계에서 마르크스주의가 떠오르는 것에 대해 독일에서와 같이 조심스럽게 받아들이는 상태에 있었다.

2) 1924년에 새 제목으로 나온 좀바르트의 제10판 책인,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마르크스주의)』(Der proletarische Sozialismus(Marximus)는 마르크스 사회주의를 대놓고 깨부수고 있다.

3) 미제스가 좀바르트에 관해 가장 호의적으로 말한 것은 이것이다: “그는 아주 재능이 뛰어났으나 진지하게 생각하고 연구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 . .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학자들보다는 좀바르트에게 말을 하는 것이 좀 통할 수 있었다. 적어도 그는 멍청하거나 우둔하지는 않았다.” 미제스(1978), 『회상록』 (Spring Mills, Penn: Libertarian Press), p.103.

4) 미제스(1925), 반(反)마르크스 주의, 『간섭주의 비판』, pp.107-38.

5) 미제스(1925), 『간섭주의 비판』, p.140. 

6) 케인즈는 개인주의를 비판하면서 자신이 자유방임주의의 논거를 박살내었다고 믿었다. 존 메이너드 케인즈(1926), 『자유방임주의의 종말』 (London: Hogarth Press) p.39를 보라. 케인즈는 개인주의와 집단주의의 이분법 가정을 따르다보니 최적의 사회조직 문제에 대해 요즘 유명해진 코스(Coase)의 관점을 예상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케인즈는 통제 및 조직의 이상적인 크기는 개인과 현대 국가 사이의 어느 지점일 것으로 추측했다(전게서, 41쪽). 코스의 이론은 로널드 코스(1988), 『기업, 시장 및 법』(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에 가장 잘 나타나 있다.

7) 하인리히 디첼(1923), “개인주의”, 『국가학 사전』 4판 5권 ; 알프레트 프리브람(1912), 『개인주의 사회 철학의 전개』 (Leipzig: Hirschfeld); 오트마르 쉬판(1921), 『실질적 국가』 (Leipzig: Quelle & Meyer).

8) 그는 이렇게 말했다: 최종적 분석에서는 사회와 개인 간에는 이익 갈등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모든 개인은 고립 상태보다는 사회 속에서 자신의 이익을 더 효율적으로 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개인이 사회에 대해 희생하는 것은 임시적일 뿐이며, 더 큰 이익을 얻기 위해 작은 이익을 내어준다. 이것이 흔히 말하는 이익들의 조화(harmony of interests)라는 원리의 핵심이다. 미제스(1925), 『간섭주의 비판』, p.112.

9) “사회가 무엇이고 그것이 어떻게 생겨나며 어떻게 변동하는가는 바로 과학적 사회학의 규명할 본질이다.” 미제스(1981), 『사회주의: 경제적 및 사회적 분석』(Indianapolis: Liberty Fund, 1981). 완벽하게 명확한 말로 표현한다면, 미제스는 사회 전체(social wholes)의 생성 및 변동에 관한 실증 분석은 방법론적 개체주의(methodological individualism)에 의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분석에 토대하면 공리주의적 방법을 적용할 수 있다. 즉 어떤 주어진 정책이 그 목적 달성에 적절한가라는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오트마르 슈판은 정치적 지향점으로도 또 방법론적 도구로도 개인주의를 거부했다.

10) 미제스(1925), 『간섭주의의 비판』, p.112.

11) 미제스(1925), 『간섭주의의 비판』, p.100. 미제스는 여기서 파울 바르트(Paul Barth)의 『사회학으로서의 역사 철학』 (3판), (Leipzig: Reisland, 1922), p. 260을 인용하고 있다.

12) 미제스(1925), 『간섭주의의 비판』, p.117.

13) 케인즈(1926), 『자유방임주의의 종말』, p.42.

14) 미제스(1925), 『간섭주의의 비판』, p.137.

15) 랠프 레이코(1999), 『자유의 정당: 독일 자유주의의 역사 연구』 (Stuttgart: Licius & Lucius)의 6장을 보라.



저자) Jörg Guido Hülsmann

외르크 귀도 휠스만은 독일 출생의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자로 미제스 연구소의 시니어 펠로우를 거쳐 현재 프랑스의 앙제(Angers) 대학에서 거시경제, 화폐금융 및 경제 철학을 가르치고 있다. 『화폐 생산의 윤리학』(2007), 『미제스: 자유주의의 최후의 기사』(2008) 등의 저술이 있다. 


역자) 김행범 (부산대학교 교수) 

원문) https://mises.org/wire/nazis-were-not-marxists-they-were-socialis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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