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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Libertarianism)는 비현실적인가?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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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작성일18-09-10 17:36 조회1,11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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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Libertarianism)는 비현실적인가? [3-3]

Duncan Whitmore, 2018. 07. 07 (권혁철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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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진주의 대(對) 점진주의(Radicalism vs. Gradualism)


자유주의가 “비현실적”이라고 하는 주장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버전으로서 지금 분석하고자 하는 것은 자유주의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지도 않을뿐더러 반드시 인간 본성에 위배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는 버전이다. 그런데, 이 버전은 민주국가가 전 세계적으로 단단하게 자리를 잡고 또 사람들이 본래 국가주의적이어서 자유주의적인 사회가 굳건하게 뿌리를 내리고자 하는 그 어떤 희망도 좌절될 것이기 때문에 자유주의는 결국 실패한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의 기본적인 추동력은 자유주의가 본질적으로 품고 있는 급진적 특성에 대한 공격이고, 보다 일반적으로는 급진적인 이상을 추구하는 자유주의에는 아무런 희망도 남아 있지 않다는 공격이다. 반(反)자유주의자들은 이런 이유들을 통해 자유주의를 묵살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해한다. 다른 한편 자유시장 지지자들 중 몇몇―예를 들어 말년의 밀턴 프리드먼(Milton Friedman) 같은 사람―은 이러한 주장을 받아들이고 일종의 점진주의를 통해 국가 시스템 내에서 보다 많은 자유를 달성하고자 시도한다. 우리는 반급진주의를 통해 국가주의를 변호하는 쪽과 자유에 대한 점진적 접근을 시도하는 쪽 모두를 비판한다.


먼저, 하나의 명제는 그와 반대되는 명제가 광범위하게 인정되고 잘 뿌리 내리고 있다는 사실로 인해서 급진적이 될 수 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인기 없는 명제가 진실 혹은 정의라는 측면에서 중요성이 떨어진다고 할 수는 없다. 예를 들자면, 누구나 한 때는 지구가 평평하고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렇게 합의가 이뤄졌다고 해서 그 합의가 지구가 둥글게 생겼고 그리고 지구가 태양의 둘레를 돈다는 사실을 바꾸지 못하며, 또한 그와 같은 합의가 인간을 둘러싼 환경에 대한 사람들의 지식에 중요한 진전이 이루어지도록 하지도 못한다는 사실을 바꾸지는 못한다.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들이 흑인을 살해하거나 여성을 강간하는 것을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고, 더 나아가 기꺼이 살해하고 강간했다고 해서 이런 행위들이 모든 노력을 기울여 중단시켜야만 되는 본질적으로 악한 행동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더구나 즉각 중단되어야만 하는 행동이다. 뿌리박힌 견해에 반하는 주장을 할 때 따르는 어려움은 급진적인 목표를 추구하는 우리의 전략을 분명 더 어렵게 만들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반자유주의자들이 보이는 태도와는 달리, 무엇보다도 목표 그 자체를 무효화시키지는 않는다. 진실은 모든 사람들이 없어지기를 원한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며, 경우에 따라서는 진실이 -가령 국가의 진정한 특성과 국가가 인간을 망치는 방식과 같은 것이- 드러나면 아주 강력한 결과로 이어져 어려움을 겪는 고통이 가치가 있을 수도 있다. 실제로 권력에 -또는 심각한 역경에- 대항해서 진실을 말하지 못하는 것은 현실주의의 징표라기보다는 비겁함의 징표이다. 필요한 용기를 끌어 모으는 데 있어 수반되는 복잡성에 대해서는 아마도 조셉 페덴(Joseph R. Peden)이 다음과 같이 언급함으로써 가잘 잘 표현하고 있는 것 같다:


“자유주의 혁명은 하루아침에, 혹은 10년 안에, 혹은 자신의 일생 기간 내에 이루어지는 과업이 아니다. 그것은 오랜 세월에 걸쳐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과정이다. 투쟁의 초점은 시간과 장소에 따라 바뀐다. 한때는 노예제의 폐지가 초점이었다; 현재는 초점이 여성 해방일 수 있다; 이곳에서는 초점이 민족해방 투쟁일 수 있고, 다른 곳에서는 시민의 자유가 초점이 될 수 있다; 어떤 때에는 선거운동과 정당정치가 초점이 될 수 있고, 또 다른 때에는 무장(武裝)을 통한 자위(self-defense)와 혁명이 초점이 될 수 있다[.....] 자유주의자들 가운데에는 국가가 해체되고 무정부주의가 우세해지는 묵시록적 순간을 기대하는 경향이 있다. 만약 그 중대한 순간이, 설혹 온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에 올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면, 그들은 자유주의 철학의 완결성과 타당성에 대한 믿음을 잃는다.[.....] [이는] 자유주의가 광범위한 인간적 이해를 통해 숙성되지 못하면 유아적인 환상으로 쉽사리 변질될 수 있음을 경고한다. 자유주의는 어떤 고정 관념이나 신비한 마술적인 공식이 아니라 사회적 현실의 복잡성에 한 번 다가가 보라는 도덕적 명령이다.”1


역사의 발전을 돌아보면 사상들―특히 급진적 사상들―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스페인 철학자인 호세 오르테가 가셋(José Ortega y Gasset)이 “문명은 저절로 생겨난 것이 아니다”라고 알려주었던 것처럼, 그것이 또한 저절로 유지되는 것은 아니다.2 다른 말로 표현하면, 문명의 존재를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여서는 안 되며 그 문명을 파괴하려는 것들을 격퇴하면서 올바르게 유지하려는 사상을 갖고 참여하려는 적극적인 의지를 필요로 한다. 그러한 사상들 대부분은 어떤 면에서는 오직 소수의 지식인이나 저자들에 의해 받아들여질 정도로 급진적이며 대중들로부터 조롱당하는 이론들로 시작했지만, 이후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진 다음에는 중대한 결과로 이어졌었다. 예를 들어 계몽 철학이 없었다면 미국 혁명, 프랑스 혁명 및 산업혁명은 결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칼 마르크스는 급진적이라고는 할 수 없는 상대적으로 모호한 상태에서 죽었지만, 그의 이론은 세계의 절반을 노예화시켰다; 민주주의는 정치사상사에서 진지하게 받아들여진 적이 거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누군가가 민주주의가 완벽한 것은 아니라는 말만 꺼내도 이상한 사람으로 조롱을 받는다. 나아가 점점 심각해지는 국가의 팽창과 계속되는 국가의 잔혹행위에 대해 이제까지와는 달리 이를 정당화시켜주는 면죄부를 민주주의가 국가에 부여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논의하는 것조차 어려운 지경이다. 예를 들어 천년에 걸친 왕국, 황제국, 그리고 견고한 왕조(王朝)도 전적으로 지폐(paper money)로만 교환이 이루어지는 세상을 만들지는 못했다. 그런데 민주주의는 그 일을 불과 수십 년 만에 해냈다.


간단히 말하면,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이 극적으로 변해 왔고, 그것이 사람들에게 아주 엄청난 영향을 주어왔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만약 우리가 역사의 경로를 바꾸고자 한다면 사람들의 생각에 영향을 미칠 준비를 해야만 한다.3 오늘 비난을 받는 사상들이 내일이면 칭송받게 되고, 오늘 볼 때는 승리가 너무나 멀어 보이겠지만, 그렇다고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그런 것은 아니다. T.S.엘리엇(Eliot)은 이렇게 말했다.


“어느 하나의 사안을 가장 광범위하고도 가장 현명하게 바라보게 되면, 실패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아무 것도 없이 저절로 이루어진 성공이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실패와 투쟁을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패배와 우리의 실망이 우리 후손들의 승리의 서막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비록 그 승리가 일시적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우리는 어떤 것이 승리하기를 기대하면서 투쟁하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이 계속해서 살아남도록 하기 위해 투쟁한다.”


이제 점진주의에 대해 살펴보자. 최종 목표나 급진적인 원칙을 내동댕이치는 전략은 어떤 사안을 질적으로 다른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왜냐하면 그러한 전략은 자신이 선택한 것을 알리기 위해서는 자신의 이데올로기적 공백을 무언가 다른 지도적인(guiding) 철학으로 메꿔야만하기 때문이다. 자유에 대한 명백하게 점진주의적인 접근 방법은 이런 저런 종류의 공리주의로 귀결되었다. 이에 덧붙여 점진주의가 국가를 비판하던 것과는 반대로 국가와 긴밀히 연관되어 활동하는 방향으로 옮겨가다보니, 그 지지자들은 국가가 저지르는 기본적으로 부정의한 일들(가령 과세, 규제, 그리고 법과 질서유지 및 국방에 대한 독점력 행사 같은 것들)이 영속화되는 것을 인정하도록 압력을 받아왔으며, 그러다보니 그들의 비판도 어떤 종류의 비판이냐 하는 것보다는 어느 정도 수준의 비판이냐 하는 쪽으로 변질되어 왔다. 결과적으로 그들이 집착하는 “효율성”이라는 척도는 점진주의적 접근법으로 하여금 그들이 괜찮다고 보는 이러한 부정의한 일들을 인정하고 확장시키도록 만들었다. 따라서 자유화 프로젝트(liberalising project)의 성격이 부정의에 도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인정하거나 아니면 그보다도 더한 부정의로 대체되는 것을 인정하는 것으로 변질되었다.4


예를 들어 19세기 노예제 폐지와 관련된 논쟁은 노예소유주들이 노예를 잃음으로써 발생하는 “재산”상의 손해를 보상해 주어야 할 것인지 아닌지 하는 논쟁으로 점철되었다. 보상을 받아야 할 사람은 노예소유주가 아니라 수년 간 비참한 생활을 해왔던 노예들이며, 노예소유주들은 오히려 벌을 받아야만 한다고 지적했던 사람은 급진적 철학자인 벤자민 피어슨(Benjamin Pearson)이었다. 마찬가지로 “학교 바우처”(School Vouchers)제도에 대한 제안들은 국가에 의한 주입식 교육의 본질은 말할 것도 없고 모든 교육비용을 부담해야 하는 납세자들의 선택과 주권에 대한 일말의 고려조차 하지 않는 채 그저 “선택”, “경쟁” 및 “소비자 주권”의 이점에 대해서만 열변을 토한다. 그리고 당연한 일이지만 그 어떤 조세 개혁도 “조세수입의 중립(revenue neutral)”이 지켜질 수 있도록 세법이 개정되어야 한다는 필요성으로 인해 항상 엉망이 된다. 조세수입의 중립성은, 아담 스미스 연구소의 2017년 조세개혁 계획의 첫 번째 문장의 중요성으로 판단하건대, 이 연구소의 우선 관심 사항으로 보인다.5


이제 여성을 강간하고 흑인을 살해하는, 앞에서 이야기했던, 상상 속의 사회로 돌아가 보자. 점진주의적 접근법은 살해자나 강간범이 살해하고 강간하는 즐거움을 상실하기 때문에 그들에게 보상을 해야 한다고 할지 모른다; 혹은 “강간 바우처”를 발행하자고 할지 모른다; 혹은 “살해 개혁”은 “살해 중립성”이 지켜져야 한다고 할지도 모른다. 이렇게 본다면, 이러한 제안들이 아주 우스꽝스러운 제안들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자유 사회라고 할 수 있는 것과는 질적으로 전혀 다른 무언가가 되어 버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점진주의적 접근방식에 대한 이러한 비판은 비록 부족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중요한 진전으로 이어지는 궁극적 목표를 향한 운동을 인정하는 사람을 책망하고자 함이 아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말하자면 비록 나머지 세금 부담은 여전히 남아 있겠지만, 이런 저런 조건이 붙지 않는 10%의 세금 감면을 받아들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가능한 완전하고도 가장 빠르게 획득한다는 희망을 품고 (협상)테이블로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살인, 강간, 노예제 등과 부딪히게 되면, 이 사악한 것들을 완전히 제거한다는 희망을 갖고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실제로 나타나는 모든 결과물들은 이 척도를 기준으로 판단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와는 달리 단지 절반의 해결만을 요구하면서 테이블에 앉게 되면, 절반 이상의 해결은 결코 획득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게리슨(William Lloyd Garrison)이 “이론적으로는 점진주의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영속주의(perpetuity)다”라고 말했던 이유이다.6


또한 우리는 우리가 부정의를 제거하는 일에 대해 훨씬 더 큰 재앙이 뒤따를 수 있다는 사실을 이유로―예를 들어 복지 혜택을 받던 사람이 혜택이 줄어든다면 폭동을 일으킬 수 있다― 경고를 날리는 사람을 탓하고자 함이 아니다. 이것은 단지 국가에 의해 이미 피해를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더 큰 피해를 주어서는 안 된다는 신중함의 표현일 뿐이다. 이것은 부정의를 저지르는 자가 살인자, 강간범, 노예소유자가 되었든 아니면 “사회”가 자기 자식들을 교육시킬 것이라고 기대하는 평범한 부모가 되었든 관계없이 희생자의 자유보다도 이들 부정의를 저지르는 자들의 삶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점진주의적 접근법을 졸렬하게 모방한 것이 결코 아니다. 로스바드(Murray N. Rothbard)는 이렇게 말한다:


“이론상으로 점진주의는 실제로는 다른 비자유주의적 또는 반자유주의적인 숙고사항들에게 두 번째 혹은 세 번째 자리를 내어주어야 한다고 인정함으로써 자신의 목표 자체를 약화시킨다. 점진주의의 선호 순서에서는 이들 다른 숙고사항들이 자유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7


실제로 점진주의의 치명적 결함은 배를 탈취한 해적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관심을 갖기보다는 탈취당한 배가 암초에 부딪히지는 않을까 하는 것에 더 신경을 쓴다는 점이다 (비록 럼주가 담긴 통을 나눠 가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도 이와 관련하여 역할을 한다는 점에 대해서도 언급해야겠지만.) 그러나 급진적 사상의 목적은 배가 물 위에 떠있도록 유지시키는 것이 아니다. 배가 물에 잠겨야 구조된다. 그리고 앞서도 언급했듯이, 심각하게 사회주의화된 민주주의라는 우리의 배는 거의 확실하게 가라앉고 있다. 예를 들어 1980~1990년대 소련이 무너졌을 때 장기간 고통받아왔던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원했던 것은 이미 재앙적으로 실패한 것의 약간 약화된 버전이었다. 서구의 학자들이 마르크시즘을 찬양하고 케인즈주의에 대해 설파하느라고 무척이나 분주했었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그들이 그러고 있던 기간이 모든 형태의 사회주의에 결정적 한 방을 날릴 수 있는 엄청난 기회였지만 그냥 흘려보냈다.8


자유 시장 개혁이 성공적으로 수행되고 오랜 기간 지속된 경우가 최소한 두 번 있었다. 홍콩에서 코퍼트웨이트(John James Cowperthwaite)가 수행한 개혁과 뉴질랜드에서 더글라스(Roger Douglas)가 수행한 개혁이 그것인데, 두 사람 모두 각각의 정부 내에서 재무장관이었다. 전 영역에 걸쳐 국가주의적 개입을 일소하는 “빅뱅”(Big Bang) 접근방식을 통해 위기를 일거에 날려버렸다. 더글라스 스스로는 왜 이런 접근법이 그리고 오직 이런 접근법만이 작동될 수 있는가에 대해 설명하는 시간을 가졌다.9


첫째, 분명한 목표를 정하고 그것을 재빨리 도입함으로써 특수 이해집단들이 해당 프로젝트를 망치지 못하도록 막을 수 있다. 이들이 특별한 개혁에 대응하는 방법을 알게 될 즈음에는 또 다른 집단이 나타난다. 둘째, 분명한 목표에 한 단계 한 단계 식으로 접근해가기보다는 단박에 도달해야 그것의 긍정적인 효과가 더 빨리 나타나고 그것에 대한 대중들의 지지를 매우 빨리 획득할 수 있다. 이것은 개혁을 시도하기 전에 이해집단들과 합의에 도달하기 위한 노력은 (더글라스는 이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고 보았다) 전혀 필요치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또한 오직 몇몇의 국가 개입만이 조금씩 없어질 때 계속 잔존하게 되는 경제 왜곡의 문제도 해결한다. 셋째, 진보와 번영을 피부로 느끼면서 지지자들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이들의 지지가 반대자들을 무력화시킨다. 아주 그럴 듯한 실질적인 대안을 제시할 능력을 보이지 못하는 반대자들은 공허하고 진부한 이야기나 읊어대는 사람들로 전락한다.10 그리고 마지막으로, 개혁의 진행이 빠르면 빠를수록 법적 및 규제 환경을 둘러싼 불확실성의 기간이 짧아지고, 이는 기업과 기업가들로 하여금 더 일찍 계획을 세우고 자본 투자를 하도록 만든다.11


무엇보다도 더글라스는 자신의 반대자들이 무기를 꺼내기도 전에 일을 해치웠고 그들을 무력화시켰다. 이러한 결과는 신속하고도 급진적인 개혁은 실제 성공으로 이어지고, 이 성공은 다시 앞으로의 개혁에 대한 지지로 이어지는 선순환작용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는 더글라스의 전임자였던 멀둔(Robert Muldoon) (그는 총리를 겸했었다)이 했던 접근법과는 반대되는 것으로 멀둔은 단기간 내에 어느 누구의 사정도 나빠지지 않을 그런 것들에 대해서만 변화를 시도했다. 결국 그는 거의 아무 것도 이루지 못했다.


우리는 반자유주의자들과 점진적인 자유시장주의자들 양쪽 모두에 대해 그들이 갖고 있는 가장 가능성 있는 시나리오를 인정해줌으로써 급진주의 방어를 마무리할 수 있다. 만약 자유주의 목표가 한꺼번에 달성되어 지금 당장 국가가 무너지고 사라진다면 어떻게 될까? 만일 우리가 리드(Leonard Read)12가 묘사했던 시나리오처럼 국가를 즉각적이고 가차없이 사라지게 할 수 있는 커다란 적색 버튼(red button)을 누르게 되면 어떻게 될까? 


국가주의자들은 사회가 엄청난 혼란에 빠질 것이라고 말할 것이고, 점진주의자들도 아마도 똑같은 말을 할 것이다. 그런데 정말 그렇게 될까?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국가라는 존재는 의식적인 선택의 산물이다―그것은 특정 목적들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다. 국가가 이 목적들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들을 더 이상 제공하지 않을 때 우리 모두가 포기하고 다른 대안을 찾지 않는다면 이것이 이상한 일이다. 자연은 진공상태를 혐오한다. 하물며 행동하는 인간은 더더욱 그렇다. 


따라서 만일 국가가 연기처럼 사라지게 되면, 아마도 숨 가쁜 전환기가 오겠지만 사람들은 곧 자신들의 재산을 보호하고 방어하는 조치들을 취할 것이고, 이러한 사적인 수단들을 통해 궁극적으로는 국가가 독점적으로 제공하던 것들을 대체하게 될 것이다. 시민적 질서가 실제로 무너져 있는 기간은 이러한 사적인 수단들이 융성하거나 혹은 공식적인 조직들로 확고해질 때까지 그렇게 오래 지속되지 않으며, 예를 들어 1992년 LA 코리아타운에서의 폭동. 2011년 영국에서의 폭동, 그리고 2014년 8월의 미주리의 퍼거슨 폭동처럼 공식적인 국가 경찰력이 구조에 실패하는 중요한 사건들이 생기면 그러한 사적인 수단들이 곧 바로 등장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어떤 경우에도 나쁜 짓(did otherwise)을 하면 국가가 우리를 벌할 것이라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 사람들이 사적인 살인이나 도둑질을 삼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국가가 없더라도 기꺼이 사적인 살인과 도둑질을 저지르는 사람들은 여전히 소수에 불과하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런 행동들을 자제하는데, 그 이유는 정부가 그런 짓을 하지 못하도록 막아서라기보다는 오히려 a) 사람들이 그런 짓은 악한 짓이라고 인식하기 때문에, 그리고 b) 순간적 희열만을 추구하는 것이 결국은 삶의 수준을 낮추는 반생산적인 것이라고 인식하기 때문이다. 국가가 사라진다고 해서 이런 관점이 변하지는 않는다. 만일 국가주의 질서를 지지하는 어떤 사람이 세상은 (자유주의자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다고 주장한다면, 만일 국가가 갑자기 사라진다면 당신은 어떻게 행동할 것 같은지 그에게 물어보자. 약탈하고 노략질하는 사람들 틈에 낄 것인지, 창문을 깨부수고 가게에 불을 지를 것인지? 아니면 시민적 질서와 유사한 무언가를 만들기 위해 노력할 것인지? 만약에 그가 후자(後者)를 선택한다면, 도대체 그는 무슨 근거로 다른 사람들은 전자(前者)를 선택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인가? 실제로 국가를 제거하는 것은 폭력 행위가 합법적으로 저질러질 수 있는 유일한 통로로 간주되는 그런 제도를 없애버리는 것이다. 따라서 합법성이라고 하는 가림막(베니어판)이 제거됨으로써 국가가 즉각적으로 파괴되고 나면 야만의 시대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들의 도덕적 개선이 재빠르게 일어날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바로 이 지점에서 점진주의자들의 논지가 순수 국가주의자들의 논지에 비해서도 허약하다는 점이다. 국가주의자들은 무엇보다도 시장(Marketplace)은 받아들여질 수 있는 사회 질서를 만드는데 적합하지 않다며 불신하고 있다. 따라서 국가의 갑작스런 소멸은 대혼란으로 이어진다는 것이 그들의 결론이며, 이런 면에서 최소한 나름의 일관성을 갖는다. 하지만 점진주의자들은 보다 많은 음식, 의복, 자동차 등등을 제공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사적 개인들이 “효과적”이라고 칭송한다. 그런데, 몇 가지 이유를 들면서 그들은 자유사회로의 전환을 관리하는 데 있어서는 이들 사적 개인들을 믿을 수 없다고 한다.


결론


결론적으로 자유주의 원칙들은 매우 급진적이지만, 그 원칙들을 성취해나가는 길은 전혀 급진적이지 않다. 유럽연합(EU)과 같이 중앙집권화된 국가주의 프로젝트는 서구 문명의 문화적, 관습적, 종교적 기반을 파괴하고, 그 자리를 그들 자신의,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초국적(trans-national), 다문화적 거대 단일조직들(Monoliths)로 대체하고자 한다. 실제로 이러한 목표들은 예속 당하는 사람들에 의해 너무 급진적이라는 이유로 거부당하고 있다. 그런 시도들에 대해 반대하면서 대부분의 자유주의자들은 우리 자신들을 새롭게 하기 보다는 세상을 새롭게 창조하려는 시도들을 막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더구나 좌익/국가주의적 광란은 한낱 웃음거리로 전락해 버려서 정치풍자를 하는 사람들은 풍자의 소재를 찾는 데 큰 어려움을 겪고 있을 정도다. 그리고 이전에는 믿기지 않는 농담이라고 여겼던 것들이 이제는 완전히 현실처럼 되어 있다.13 잘 형성되어 있는 사회적 관습에 구애받지 않음은 물론이고, 기본적 논리와 상식(common sense)까지 재편성하려는 오웰식(Orwellian)의 노력―“언론의 자유”란 좌익이 동의하는 말을 할 때 자유롭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똘레랑스”(관용)란 당신과 의견이 다른 사람에게는 폭력적으로 대하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인종, 동성애자 등에 대한) 증오”가 진짜 범죄보다 더 사악하다14; 성(gender)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설령 존재한다 하더라도 약 50여 가지 정도나 된다; 누가 어느 화장실을 사용할 수 있는지에 관해 논할 필요가 있다―이 이루어지고 있는 시대에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본다면 자유주의자들이 급진적으로, 더구나 비현실적으로 보이지는 않는 것 같다. 오히려 우리는 너무 “평범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 글은 원래 영국의 Ludwig von Mises Centre에서 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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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Joseph R. Peden, Liberty: From Rand to Christ, in Joseph R. Peden (Pub.), Murray N. Rothbard (Ed.), The Libertarian Forum, July–August 1971, Vol. III, nos. 6-7.

2) José Ortega y Gasset, Revolt of the Masses, p. 62.

3) 만일 그렇지 않다면, 실제로 국가는 지식인들과 교육자들의 상호선택(co-option)을 통해 자신을 정당화하려는 노력을 그다지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4) 모든 점진주의자, 네오-리버럴 및 공리주의적 자유 시장주의자의 정치 이론은 명백한 국가주의자의 정치 이론과 근본적으로 아무런 차이가 없다. 모든 정치 철학은 해당 철학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목표와 상충되지 않는 한 개인적 자유를 인정한다. 그런 자유 시장주의자들은 자유가 그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 그 무엇으로 귀결될 때까지는 우리 모두를 자유롭게 놔두는 것에 만족한다.

5) https://www.adamsmith.org/blog/taxin2017. 흥미롭게도 저자들은 단순히 의자를 재배치하는 것 이상 아무 것도 아닌 이 프로그램을 “급진적”이라고 말하는 뻔뻔함을 보인다.

6) 호페(Hans-Hermann Hoppe)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예를 들어 하이에크나 프리드먼과 같은 온건한 자유시장주의자들에게서 벌어지는 이론 수준에서의 타협은.....철학적으로만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도 비효율적이고 사실상 반(反)생산적이다. 그리고 사실상 그들의 사상은 국가 지배자들과 국가주의자들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쉽사리 상호 선택(co-opted)된다.....다른 말로 하면, 이론적 타협 또는 점진주의는 국가주의의 잘못됨, 사악함 및 거짓이 영속되도록 만들며, 오직 이론적 순수주의, 급진주의 및 비타협주의만이 우선은 점진적인 실제 개혁과 개선으로, 그리고 마지막에는 가능한 한 최종 승리로 이끌 수 있고 또 이끌고 있다. Hans-Hermann Hoppe, Rothbardian Ethics, Ch. 15 in The Economics and Ethics of Private Property, p. 395.

7) Murray N. Rothbard, For a New Liberty, p.380.

8) 동구권과 서구권이 만나는 컨퍼런스나 회담이 열릴 때면, 소비에트 경제학자들은 자유시장의 경이로움에 대해 발언하는 반면 서구의 경제학자들은 사회주의를 열렬히 찬양하더라고 하는 것이 냉전 기간 동안 경제학자들 사이에서 회자되던 슬프도록 아이러니한 농담이었다.

9) 이하의 설명은 더글라스가 쓴 책 Unfinished Business에 대한 플로루(Floru)의 분석에 기반하고 있다.  J. P. Floru, Heavens on Earth – How to Create Mass Prosperity, pp. 233-4 참조.

10) 플로루에 따르면, 개혁에 대한 지지가 광범위하다보니 농부들이 보조금 폐지(subsidy-free)의 중요성을 이해할 정도였다고 한다. Ibid, p. 235.

11)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영국이 EU 멤버국가에서 완전한 주권국가로 이행될 때 취했던 행동에서 점진주의의 효과가 어떠했는지를 볼 수 있다. 정치인들은 기업에게 “확실성”을 제공할 필요성이 있음을 끊임없이 강조한다. 그렇다면 지금 당장 EU에서 완전히 탈퇴해야 하는 것이 맞지 않는가? 이와는 반대로 탈퇴과정은 국가에 의해 관리되고, 3년에 걸쳐 이루어지도록 되어 있어 그로 인한 법적 환경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제대로 알 수 없도록 되었다. 이것은 상당한 불확실성을 야기하고 있다.

12) Leonard Read, I’d Push the Button, https://fee.org/resources/id-push-the-button.

13) http://www.digitalspy.com/tv/news/a850775/armando-iannucci-the-thick-of-it-wont-be-return-reason-why/

14) http://www.breitbart.com/london/2018/01/02/london-police-will-ignore-minor-crimes-unless-hate-crime/



글쓴이) Duncan Whitmore

옮긴이) 권혁철 (자유기업원 부원장)

원문) https://mises.org/wire/libertarianism-utop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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