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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자 주권에 대한 로스버드의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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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작성일18-05-31 20:10 조회72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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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자 주권에 대한 로스버드의 비판

Robert P. Murphy, 2018.04.13 (황수연 역)


78e8e77e248f53f148b69d75e84bbf8d_1527764536_6888.png이전의 논문에서,​[1] 나는 루트비히 폰 미제스가 소비자 주권(consumer sovereignty)을 지지한 것을 개설(槪說)했다. 이 원리는, 자본가들과 지주들이 누리는 피상적인 권력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하에서 진정한 상관이 소비자들이라고 진술한다. 미제스는 시장 경제가, 소비된 어느 페니(penny)나 다 사회의 희소한 자원들이 돌려질 용도에 영향을 미치는 한 표(vote)가 되는, 말하자면 나날의 국민 투표(plebiscites)를 행한다고 주장했다.


미제스에 의한 그것의 지지에도 불구하고, 많은 현대 오스트리아학파 학자들은 소비자 주권의 관념을 부정확한 정치적 은유로서 거부한다. 오도하는 라벨 외에도, 많은 오스트리아학파 학자들은 소위 소비자들의 주권을 존중하지 못한다고 주장되는 (“독점 가격(monopoly prices)”과 같은) 시장 결과들에 대한 암묵적인 비판을 거부한다.


“소비자 주권”의 학설에 대해 가장 주목할 만한 오스트리아학파 반대 논거는 <인간, 경제, 그리고 국가(Man, Economy, and State)>에서 머리 로스버드(Murray Rothbard)가 한 논의였다.​[2] 아래의 나의 논의는 로스버드에 크게 의존하는데, 하기야 내가 일정한 논점들을 다르게 진술할지도 모르겠다.


자기 주권 대 소비자 주권


그 학설에서 가장 명백한 흠은 그것의 바로 그 이름이다. 로스버드가 설명하듯이,


“소비자들의 주권(consumers’ sovereignty)”이라는 용어는, 경제학에서, 오직 정치적(political) 영역에만 적합한 . . . 용어의 남용의 전형적인 예이고, 따라서 다른 학문 분야들로부터 인용한 은유를 적용하는 위험의 실례이다. “주권(sovereignty)”은 궁극적인 정치적 권력의 특질이다. 그것은 폭력의 사용에 의존하는 권력이다. 순수하게 자유로운 사회에서는, 각 개인은 자기 자신의 신체와 재산에 대해 주권적이고, 그러므로 자유 시장에서 통용되는 것은 이 자기 주권(self-sovereignty)이다. 어느 누구도 어떤 다른 사람의 행동이나 교환에 대해 “주권적(sovereign)”이지 않다. 소비자들은 생산자들을 여러 직업들과 일에 강제할 권력을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전자는 후자에 대해 “주권적”이지 않다. (561​[3], 강조는 원전의 것임)


전문적 부정확성―즉, 소비자들이 생산자들에 대해 진정으로 주권적이지 않다는 것―과는 별도로, 그 학설은 시장 경제에 대한 모욕이다. 우리는 미제스가 저술 활동을 하고 있었을 때 “진보주의적(progressive)” 사회 사상가들이 민주적 평등주의(democratic egalitarianism)를 미래의 물결로 찬양하고 있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자본주의는 귀족주의적이고 봉건주의적인 과거의 잔재인 것 같은 비위에 거슬리는 체제였다. 그들은 경제 체제로서의 사회주의가 정치 체제로서의 민주주의에 대한 필요 유사체라고 생각했다.


이 역사적인 맥락에서, 미제스가 반대 입장, 즉 자본주의가 중앙 계획 경제보다 훨씬 더 “민주적(democratic)”이라고 주장할 것이라는 점은 이해할 수 있다. 심지어 그렇다 하더라도, 그러한 비교는 시장을 정당하게 다루지 않는다. 자유 시장(free market)이 어떤 민주주의보다 훨씬 더 좋은 사회 조직 체제다!


민주적 선거에서는, 오직 한 후보만 승리할 수 있다. 불가피하게, 패배한 후보에 지지 투표한 사람들은 좌절감을 느낄 것이다. (바라건대 훌륭한 헌법은 승리자들이 패배자들을 착취할 수 있는 정도를 제한할 것이다.) 그러나 시장 경제에서는 이러하지 않다. 간단한 예를 들면, 구두 생산에 관해, 자본가들과 지주들은 소비자들의 여론을 조사한 다음 모두 중위 발(median foot) 크기인 구두들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일어나는 일은 표준 크기의 구두들이 대량 생산되지만 이례적으로 작거나 이례적으로 큰 발을 가진 소비자들에 대해서도 틈새시장(niche market)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만약 구두 생산이 민주적 통제를 받는다면 그것은 그러한 보통과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참으로 잔혹한 일일 것이다.


비일관성


소비자 주권의 학설에 대한 또 하나의 문제는 (헛(Hutt)과 같은) 그것의 옹호자들이 한 편에서 동어반복적 정의 대 다른 편에서 규범적인 기준 사이에서 헤매는 것 같다는 점이다.


만약 우리가 소비자 주권으로 의미하는 전부가 생산이 궁극적으로 소비 목적에 이바지해야 한다는 것이라면, 그렇다(yes), 시장 경제는 불가피하게 소비자 주권을 나타낸다. 심지어 생산자가 가능한 화폐 수익을 포기하는 외관상 반례들조차도 단지 생산자 자신에 의한 소비의 예일 뿐이다. (나는 나의 이전의 논문에서 아파트 건물들을 세워 더 높은 화폐 소득을 벌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자기 집 둘레의 수풀을 제거하기를 거부하는 어느 가구주의 예를 제공했다.)


그러나 소비자 주권의 옹호자는 보통 이 간단한 자명한 이치(truism) 이상을 의미한다. 로스버드가 설명하듯이, “필연적인 사실(necessary fact)로서의 소비자들의 주권과 위반될 수 있는 이상(ideal)으로서의 소비자들의 주권이라는 모순된 개념 사이에 갈팡질팡하면서, 경제학자 헛은 이 주권이 언제 위반되고 있는지를 결정할 다양한 기준들을 수립하려고 한다”(562-63, 강조는 원전의 것).


일단 우리가 이 길을 내려가기 시작하면, 우리는 곤란에 봉착한다. 왜냐하면 이제 모든 생산 결정들을 고객들의 소비 욕망이나 생산자 자신의 소비 욕망을 만족시키는 것으로 분류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우리는 이제, 그 생산자는 그 자원들을 자신이 직접 소비하기 위해 산출물을 “제한하고(restricting)” 있는가, 아니면 그는 단지 남아 있는 산출물을 자기가 자기의 고객들에게 팔 수 있는 가격을 올리기 위해서만 그렇게 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전자의 경우, 소비자 주권이 존중되지만, 후자의 경우, 그것이 위반되었다고 헛(과 미제스)은 말할 것이다. 이것은,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자들이 자기들이 사용하는 경제적 바람직함(economic desirability)의 기준을 정말 생산자의 보이지 않는 의도(intentions)에 두기를 원하는가? 라는 질문을 제기한다.


커피 사례


우리는 이 마지막 논점을 소비자 주권의 위반의 최상의 예라고 생각되는 것을 가지고 설명할 수 있다. 나의 이전의 논문에서, 나는 백만 부셸(bushelsㆍ1부셸은 약 2말)의 커피가 어느 나라에서 수확되는 시나리오를 고안했다. 이제 만약 그 커피가 수십 명의 독립적인 생산자들에 의해 소유된다면, 그들은 커피의 시장 가격에 사소한 영향을 끼칠 것이고 따라서 전 수확물을 부셸당 50달러에 팔 것이라고 가정해 보자.


대조적으로, 만약 어느 독점자가 백만 부셸 모두를 소유한다면, 그는 각각 75달러에 단지 80만 부셸만 판매함으로써 최대의 이윤을 벌 수 있을 것이라고 가정해 보자. 만약 소비자 수요가 이것을 허용한다면, 그는 정말 그렇게 할 것이다. 더 나아가서, 우리는 심지어 그 사악한 독점자가 (아마도 자기 부하들이 스스로 그것을 비밀리에 판매하는 것을 막기 위해) 잉여 20만 부셸의 커피를 불태우는 것을 상상할 수도 있다. 만약 생산자들이 소비자들의 수임자로 행동하게 되어 있다면, 생산자가 실제로 희소한 소비재의 약간을 파괴하는 이 가설적인 사례를 헛이나 미제스 같은 어떤 사람이 얼마나 개탄할지 우리는 확실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잠깐 기다리시라. 만약 생산자가 자기 자신의 소비 목적을 만족시키기 위해 어떤 재화의 단위들을 파는 것을 삼간다면 그것은 소비자 주권의 위반이 아니라고 헛과 미제스 둘 다 주장한다. 따라서 만약 어느 판매자가 100개의 병 로켓(bottle rocketsㆍ빈 병에서 발사될 수 있는 모형 로켓)을 가지고 있지만, 단지 그것들 중 80개만 팔고 그 다음 그것들 중 20개를 스스로 자기 뒤뜰에서 날려버린다면, 이것은 소비자 주권의 위반이 아니다. 아주 명백하게 이 경우 일어난 것은 병 로켓의 판매자가 “자신에게서(from himself)” 그것들 중 20개를 사서 그 다음 그것들을 보통의 방식으로 “소비했다(consumed)”는 점이다.


그러나 설사 우리가 경우를 인정한다 할지라도, 우리의 가설적인 커피 독점자에 대해서는 어떤가? 만약 그가 커피가 타는 것을 보는 것에서 스릴을 얻는다면 그의 행동이 허용될 수 있을 것이라고 우리는 정말 주장하고 싶은가? (이것은, 결국, 일어날 수 있는데, 어쩌면 그 친구는 방화광일 것이다.) 만약 우리가 소비자 주권의 학설을 현실 세계 상황에 실제로 적용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따라서 사람들의 주관적 동기를 분석하는 곤란한 입장에 놓이게 된다. 다른 예를 들면, 만약 유명한 가수가 1년에 단지 한 번만 공연한다면, 그녀가 자기의 팬들의 “주권”을 존중하고 있는지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 우리는 그녀가 단지 이윤을 올리기 위해서만 덜 생산하고 있는지 아니면 그녀가 더 많은 여가 시간을 소비하기 위해 그렇게 하고 있는지 알 필요가 있다. 전자의 경우는 소비자 주권의 위반인 반면에, 후자는 그렇지 않다.


낭비?


위 분석은 소비자 주권의 학설에 내재하는 난점들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아마도 독자는 여전히 커피 독점자의 사례에 무언가 잘못된 것이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그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농작물을 태우는 것은 완전히 낭비적이지 않은가? 확실히, 만약 그가 그것에서 스릴을 얻는다면, 이것은 (명백히 괴짜의) 소비의 예이다. 그러나 생산자가 그저 자기 수입을 올리기 위해서만 농작물을 태우고 있는 더욱 현실적인 경우는 어떤가?


로스버드는 자유 시장에서는 그러한 사례들이 참으로 드물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의 주장으로는, 진정한 낭비는 20만 부셸을 태우는 데 있지 않고, 오히려 (80만 부셸보다) 백만 부셸을 재배하는(grow) 더 이른 결정에 놓여 있다. 심지어 독점자들조차도 생산 결정을 할 때 자기들의 미래 매상고를 정확하게 추정함으로써 더 많은 이윤을 벌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습관적인 제품 파괴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데, 왜냐하면 문제의 독점자는 (심지어 외관상 최악의 경우의 시나리오에서조차도) 미래에 그러한 상황을 피할 온갖 유인을 가지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원래 마지막 20만 부셸에 바쳐졌던 자원들은 소비자들이 더 많은 돈을 기꺼이 쓰는 다른 제품들을 만들기 위해 해방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광범위한 농작물 파괴의 현실 세계 예들이 정부 카르텔(government cartels) 때문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예를 들어, 대공황 동안에, 농부들은 농작물을 정말 파괴한 반면 다른 미국인들은 굶주렸다. 그러나 이것은 자유 시장의 결과가 아니었다. 아니, 그것은 산출량을 제한함으로써 농산물 가격을 올리려는 FDR(프랭클린 델러노 루스벨트)의 잔혹한 계획의 일부였다.


결론


소비자 주권의 학설은 고전적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이 자유 시장을 민주적 사회주의자들에게 정당화하려고 한 이해할 수 있는 시도였다. 그러나 그 용어는 부정확한데, 왜냐하면 그것은 폭력적인 굴복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폭력적인 굴복의 상태를 함축하기 때문이고 그것은 시장 경제에서의 “소수파(minorities)”의 대우를 심각하게 저평가하기 때문이다. 더욱 심각하게, 소비자 주권을 현실 세계 생산자들에 적용하는 것은 그들의[생산자들의] 객관적인 행동에 의존할 수 없고, 대신 그들의 주관적인 의도를 면밀히 조사해야 한다. 이런 이유들로, 많은 현대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자들은 소비자 주권의 학설을 거부한다.



링크:


[1] http://mises.org/daily/1364

[2] http://store.mises.org/Man-Economy-and-State-with-Power-and-Market-The-Scholars-Edition-P177C18.aspx

[3] http://mises.org/rothbard/mes/chap10a.asp


글쓴이) Robert P. Murphy ​(Mises Institute 선임연구위원)

옮긴이) 황수연(前 경성대 교수)

원문) https://mises.org/library/rothbardian-critique-consumer-sovereign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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