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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작성일19-06-25 11:16 조회92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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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ff Deist, 2019. 05. 22 (김행범 역) 


c14800c56bcd15d2247ab02faab6bf13_1561428722_8364.jpg대통령 자리를 열망하는 카말라 해리스(Kamala Harris)는 고용인이 100명을 넘는 기업들에게 그들이 고용인들에게 지급하는 내역을 기회균등고용위원회(Equal Opportunity Employment Commission)에 제출하는 것을 강제화하겠다고 약속했다.1) 여성에게 “충분한”(enough) 급여를 주지 않는 회사들은 받아 들여질만한 여성 채용 비율 수준을 보여줄 때까지 벌금에 처해질 것이다. 인디애나 주 사우스 벤드(South Bend) 시 시장인 “피트 시장”(Mayor Pete) 부티저지(Buttigieg)는 미국은 과거의 인종주의, 성차별주의 및 동성애혐오에 대한 배상을 주기 위해 연방 “평등법”(Equality Act)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2) 엘리자베스 워렌(Elizabeth Warren) 상원의원(역주: 미국 매사츄세츠 주의 민주당 상원의원)은 노예제에 대한 배상으로 흑인들에게 직접 현금을 지불할 것을 주장한다. 그리고 2020년 미국 대선의 모든 유력 후보들은 소득 및 부(富)의 불균형을 우리 시대의 본질적 이슈로 규정하기 위해 매우 애를 쓰고 있다.  


이 모든 공공 정책의 아이디어들을 연결하는 표면상의 연결은 실은 평등(equality)이다. 수백만의 미국인이 정부의 바른 역할은 우리를 더 평등하게 만들고 그리하여 사회를 더 정의롭게 만드는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사유재산권 및 자연권에 관한 구식의 자유주의적(old-fashioned liberal) 생각들이 이러한 세계관 속에서 발을 붙일 여지는 거의 없다. 그리고 그것은 선거 한번이나 정치인 한명으로 바뀌지도 않을 것이다. 살아 움직이는 정치적, 경제적 및 사회적 원리로서의 평등주의(egalitarianism)는 오늘날 온 서구 사회에 걸쳐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다. 


이러한 제안들은 정의(justice)에 토대하고 있는가, 아니면 증오(hatred)와 시기(envy)에 토대하고 있는가? 그것들이 아무리 터무니없고 또 아무리 관련성이 없는 것일지언정 회복적 정의(restitutionary justice)를 위해 제시되는 것일까? 혹은 분배를 하고자 하는 냉소적 정치의 총체적 표현을 반영하는 것인가? 우린 아마츄어 심리학자 노릇을 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좋은 의도를 1세기 이상 떠들어 온 후, 그 결과는 스스로 답을 주고 있다. 즉 자본주의 및 시장은 자유와 번영을 증진하는 반면에, 정치 공학(political engineering)은 그와는 반대 결과 및 제로섬을 가져온다. 


루트비히 폰 미제스(Ludwig von Mises)는 과소평가된 그의 고전인 『반(反)자본주의 정서』(The Anti-Capitalistic Mentality) 속에서 오늘날 여전히 우리를 괴롭히는 문제들의 많은 부분들을 설명했다. 미제스의 긴 이력 중 말기에 해당되는 1950년대 초반에 저술된 이 작은 책은 그의 초기 저작들 보다 더 평이한 언어 및 더 빠른 전개를 보여준다. 이 시점에서 미제스는 미국에 10년 넘게 머물렀기 때문에 그의 쓴 영어의 변화를 느낄 수 있다. 그는 어법 및 구문에서 더 유창해 졌고 경제학자로서의 노선에 머무는 것에 전혀 구애받지 않았다.   


미제스에게는 자본주의는 곧 사유재산권 및 시장이다. 그것은 문명의 동력이며, 자연스럽고도 건강한, “경제적으로 더 나아지려는 충동”(urge for economic betterment)을 가진 모든 사회의 표징이다. 그것은 인간 본성에 부합되며, 평화와 사회 응집성을 높이며, 물질적 복리를  증진하는 사회를 조직화하는 유일한 길이다. 


그렇다면 그것을 계속 헐뜯는 이유는 무엇일까? 다른 사람들에 비해 결코 덜 이기적이지 않은 자본주의 비판자들은 삶에 대해 그들이 가진 불안(unease)과 불만(dissatisfaction)으로 설명될 수 있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성경 상의 죄에 다름 아닌 시기(envy)야말로 그러한 불안과 불만의 근원이다. 따라서 비록 미제스가 훨씬 전에 “불안감을 느꼈다”(felt uneasiness)라는 생각을 그의 인간행동학(praxeology) 설명 속에서 전개했지만, 그는 여기서 그러한 불안의 심리학적 근원을 훨씬 더 철저히 검토한다. 


왜 지식인들 특히 대학 교수들이 자본주의에 원한을 품는가? 미제스의 설명은 간명하다: 그들은 그들이 경멸하는, 위험을 감수하고 기업가적 정신으로 제품을 만드는 사람들의 높은 소득과 명성에 원한을 품는 것이다. 


왜 노동계급 투표자들은 자본주의에 원한을 품는가? 자본주의는 자유를 주지만 동시에 삶에서 자신의 몫에 대한 책임 또한 부과한다(이 점을 제시했기 때문에 조던 피터슨은 좌파에게서 큰 미움을 받는다).3) 나보다 더 성공을 거둔 형제나 이웃이 있다는 것은 내 자신은 실패한 사람이란 것을 상기시켜주는 것이며, 하루하루가 발전하거나 퇴보하는 기회가 된다. 이 사실들은 평안함을 주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왜 할리우드 및 브로드웨이를 포함하여 문학 및 예술계의 엘리트들은 자본주의에 원한을 품는가? 문학 및 예술을 소비하는 대중의 취향은 변덕스럽고 금방 변한다. 섬세한 예술가의 작품이 평범한 일반 관객들에 의해 완전히 이해되지 못할 수도 있으며, 잘 나가는 배우조차도 영화가 한두 번 외면 받은 후엔 잊혀 진다.4)  


자본주의는 나쁜 예술을 만드는가?(역주: 미제스에 의하면 자본주의를 증오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자본주의는 고상하지 못한 저급한 문화 예술을 만들어 낸다는 잘못된 믿음이다). 지친 노동자 계급이 그들의 여가와 돈을 어떻게 사용하는가를 누가 감히 말할 수 있단 말인가? 라고 미제스는 묻는다. 그리고 자본주의가 제공하는 많은 것들(역주: 그것이 고상한 것이든 아니든 간에)로 인해 모든 취향들은 충족된다. 시간이 지나면 셰익스피어와 같은 특정한 천재가 나타나고 유행하는 경향이 있다. 꼭 그게 예술가의 평생 동안 부와 명성을 주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우리를 덜 행복하게, 더 불평등하게, 그리고 극심한 물질주의자로 만들어서, 다른 종류의 궁핍을 초래하지 않는가? 이에 대해 다시금 미제스는 의연하게 자신의 입장을 고수한다: 물질주의(materialism)는 찬양받을 가치가 있는 것인데, 왜냐하면 현재의 사치품들은 미래의 중산층에게는 구입가능한 필수품이기 때문이다(역주: 자동차는 처음에는 일부 고소득자의 사치품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면 중산층이면 다 소비하는 필수품이 된다). 불평등(inequality)이란 우리가 모든 경제 분석의 출발점이 되는 희소성(scarcity) 문제를 직면할 때까지는 의미가 없다. 자본 축적은 우리의 자연 세계를 특징짓는 희소성을 완화하는 유일한 길이다. 아마 행복은 정의할 수도  또 측정할 수도 없겠지만, 소비자가 원하는 바를 충족하기 위해 자동차와 냉장고 없이 살라고 요구할 권리를 가진 자가 우리 중 누구인가?5) 왜 반(反)자본주의자들은 평균적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서 매일 “국민투표”("daily plebiscite")를 하는 것을 금하려고 하는가?6)


물론 반(反)자본주의 심성에 대한 미제스의 설명은 비판자들의 도전을 받았다. 악명높은 소련 스파이인 휘태커 체임버스(Whittaker Chambers)가 내셔널 리뷰(national Review)지 지면에서 미제스의 책을 “아무 것도 모르는 보수주의”(know-nothing conservatism)로 비난했다. 이코노미스트(The Economist)지는 (그 저널이 괜찮았던 적이 있었던가?) 미제스의 이 “슬픈 작은 책”(sad little book)이 자유주의를 만화로 그린 것으로, 또 미제스를 “하이드 파크 수준”(Hyde Park standard)의 토론자(역주: 런던 하이드 파크에서 아무렇게나 떠드는 수준 낮은 토론자)로 혹평했다.


그러나 그 사이 65년 동안에 미제스가 규명했던 서구의 반(反)자본주의자들 간의 “시기, 자만, 무지 및 부정직”(envy, conceit, ignorance and dishonesty)이 옳았다고  밝혀졌는가? 20세기 후반의 사건 특히 소련 공산주의의 붕괴는 미제스가 틀렸다고 밝혀주던가?7)


“자본주의 하에서... 각인의 삶의 상태는 그 자신의 행동에 달려있다”, “자본주의 하에서 물질적 성공은 개인이 이룩한 것이 주권자인 소비자에게 어떻게 평가되는가에 달려있다”와 같은 문장들이 어떤 독자들에게는 미국식 실적제(meritocracy)에 대한 지나친 장밋빛 시각을 나타낸 것이란 인상을 줄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에 대한 미제스의 생각은 그때나 지금이나 미국의 복합적인 정치적 정실주의 체제가 아니라 자유로운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보다 큰 요지는 이것이다: 시장과 재산권은 개인에게 인류 역사상 이전에 알려진 바 없는 기회들을 주며, 그 반면에 국가 계획은 우리 모두를 바퀴 속 톱니부품으로 만든다. 


궁극적으로, 『반(反)자본주의주의 정신』(The Anti-Capitalistic Mentality)은 진보주의자들(progressives) 및 보수주의자들(conservatives)의 교리에 맞서는 역동적인 자본주의의 옹호이다. 전자(역주: 진보주의자)는 보통 사람들에게 가장 독특하고도 소중한 미국식 기회, 곧 상위 계급으로 이동할 가능성을 부정한다. 후자(역주: 보수주의자)는 시장 교란자(market disruptors)인 갑자기 부자가 되는 사람들(벼락부자 nouveau riche)에 대항하여 자신의 지위를 지키려고 한다. 그 둘 다 사람들을 제 자리에 가두어 두려고 하는 반면에, 제약 없는 자본주의는 결점마저도 그대로 드러내며 그 사람들에게 책임과 더불어 희망을 준다. 


미제스는 이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정치인들은 그의 글을 읽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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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주) 카말라 해리스는 미국 캘리포니아 주 민주당 상원의원으로 2020년 대통령 후보출마를 준비 중이다.

2) (역주) 피터 부티저지는 2020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출마를 선언한 시장이다.

3) (역주) 조던 피터슨은 캐나다 토론토 대학의 보수 성향의 임상심리학 교수이다. 

4) (역주) 이러한 대중의 변덕스런 선호에 자신의 운명이 좌우되는 자본주의를 연예인은 증오한다.

5) (역주) 인간의 행복이 물질만으로 결정되는 것은 아니지만 기본적 물질 충족 없이는 행복은 불가능하다는 의미이다.

6) (역주) 자본주의 하에서 개인은 자신의 삶 속에서 매일 수많은 선택행위를 하는데 이는 국민이 국가적 중요문제를 국민투표로 결정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자본주의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개인이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하는 이러한 국면을 인정하지 않는 셈이다. 

7) (역주) 정작 밝혀진 것은 미제스가 오히려 옳았다는 것이다.



글쓴이) Jeff Deist

제프 다이스트는 현재 미국 미제스 연구소의 회장이며 과거 오랫동안 하원의원 론 폴의 자문관 및 수석비서관 역할을 맡았었다. 


옮긴이) 김행범 (부산대학교 교수) 


원문) https://mises.org/wire/envy-in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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