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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관적 언론”이라는 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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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작성일19-04-11 16:27 조회1,092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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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관적 언론”이라는 미신

Ryan McMaken, 2019. 03. 28 (김행범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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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언론에 관한 큰 미신의 하나는 언론인들이 사실(facts)을 보도하며 객관적으로 보도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트럼프 정부에 대한 대중 매체들의 계속된 증오가 열기를 더해감에 따라 이러한 미신은 최근 점점 큰 공격을 받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분야의 안팎의 많은 사람들이 “객관적”(objective) 보도란 가능하다는 생각을 고수하고 있다. 


우리는 이런 생각을 언론인들 자신으로부터 자주 듣는 것은 놀랄 것도 아닌데 그들은 자신을 통상적인 인간적 편견을 초월해 있는 조사자요, 탐구자라고 간주한다. 그들은 단지 정보를 소통하고 그것을 보통 사람들이 소화할 수 있도록 만들어 어떤 뉴스 주제에 관해 가장 중요한 모든 정보들을 독자들에게 말해주고 있을 뿐이라고 한다.  


이런 생각은 적어도 192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그것은 이 객관적 언론의 이상을 1922년 자신의 책 『여론』(Public Opinion)에서 길게 설명했던 월터 리프만(Walter Lippmann)에게서 나온 것이다(리프만은 또한 1차 대전 경 여론 형성의 중심적 인물이기도 했다. 이에 대해 더 자세한 것은 머리 로스버드의 “진보적 언론의 승리로서의 1차 대전”을 보라).


문제는 무식한 시민들로부터 출발하는데, 그들은 정보의 “객관적”(objective) 중재자를 요구한다. 외른 헨리크 페터센(Jørn Henrik Petersen)이 약술한 바에 따르면 리프만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일반 시민들은 중요한 정보를 직접 얻을 시간도 능력도 없고 또 그런 성향도 없다. 사회는 너무나 복잡하고, 반복되는 삶의 힘은 대단하고, 당면하는 인간의 환경은 너무나 압도적이다. 적어도 리프만에게 그 처방책은 증거들을 증류하고서 남은 사실들을 제공할 수 있을 전문가 집단이 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대개의 법의 실제적 효과는 미묘하고 숨겨져 있기 때문에, 국지적 심리 상태를 통한 국지적 경험들을 여과하는 것만으로는 그것은 이해될 수 없다. 그것들은 통제된 보고와 객관적 분석을 통해서만 알려질 수 있다”라고 리프만은 주장한다. 


그러나 이 “객관적 분석”(objective analysis)은 어떻게 이룩될 수 있는가? 리프만의 해답은 언론을 더 과학적인 것이 되게 만들고 사실을 “수정하고, 객관화하고, 측정하며, [또] 거기에 명칭을 부여”하는 것에 달려 있다. 


물론 리프만이 이걸 1920년대 초기에 이걸 쓰고 있는 것이 우연의 일치는 아니다. 이때는 과거의 진보주의 시기(Progressive Era)였고, 그 때는 “과학적 엄마”(scientific motherhood) 및 미국인들로 하여금 모든 중요한 결정을 “전문가들”(experts)에게 넘기도록 사회 전반적으로 끝없이 몰아가던 시대였다. 그 결과, 엄마들은 육아 “전문가들”(experts)에게 자녀의 관리를 넘겨야 했고, 부모들은 자녀를 교육하는 특권을 “전문가들”(experts)에게 넘겨야 했으며, 경제는 공공정책의 전문가들에 의해 통제되어야 했다. 


언론 역사학자 리처드 스트렉퍼스(Richard Streckfuss)는 리프만이 이와 동일한 추세에 편승했다고 지적한다. 


리프만이 객관적, 과학 및 과학적이란 단어들을 사용한 것은 중요하다. 저널리즘을 포함해 인간의 일들에 과학적 방법을 적용하는 것은 그 시대 사고의 중심적인 것이었다. 

 

전문가들을 열망하는 것에 대해 리프만이 미친 영향은 실제로 결코 약해지지 않았다. 오늘날까지도 리프만 모델은 보다 높은 객관성을 얻기 위한 계속적인 노력들을 만들어내고 있은데, 필립 마이어(Philip Meyer)에 의해 인기가 높아진 유명해진 “정밀 언론”(precision journalism)과 같은 방법들을 장려하는 것도 여기에 포함된다. 마이어는 언론인들이 자주 리프만의 이상에서 벗어나는데 이는 주로 정보 수집의 어려움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마이어는 이에 대한 해결책은, 


강력한 정보 수집과 증명 가능한 진실을 위한 과학적 분석 도구 및 숙련된 탐색을 통합하여 언론을 과학으로 몰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이상(ideal)은 아직도 언론인들 사이에선 아주 인기가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핵심적인 정보들에 대해 객관적이고도 균형잡힌 정보를 제공하는 전문가들이며, 편향되지 않은 관점을 제공하는 것으로 신뢰받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들이라고 상상한다.  



과학자들조차 객관적이지 않다


그러나 이런 철학은 그 가장 근본적 토대에서부터 잘못된 것이다. 리프만 자신이 과학적 객관성을 주장한 사람의 일인으로서 그 자신이 과학적 탐구 및 객관성에 대해  몽상적인 생각을 품고 있었다. 물상 과학(역주: 자연과학은 생명에 관한 생명 과학과 비생명적인 현상을 다루는 물상 과학 물상 physical science로 대별되는데 후자에는 물리학, 화학, 천문학 등이 포함)은 편향성(bias)을 초월해 있다는 시각은 리프만의 시대에선 거의 보편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물상 과학자들 간에서조차 외관상의 과학적 객관성에서 수많은 결함들이 나타났다. “과학의 사회학”(sociology of science) 및 “과학의 경제학”(economics of science) 분야에서의 연구 덕택으로 애초부터 존재했었던 것을 보여주는, 즉 과학자들이 그들 자신의 개인적 편견의 효과들에서 벗어나지 못함을 보여주는 문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예컨대, 과학자들과 연구자들은 과학자들은 이를테면 그들이 큰 정부 지원금을 받는다거나 생계를 위해 특정 공공 정책에 의존하는 것에 의해 큰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들 흔히 말한다. 혹은 그들은 과학자란, 비록 드러난 진실이 과학자들이 자신의 모든 경력이 토대로 삼아왔던 이론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일지라도, 오로지 “진실”(truth)만을 추구하는 것에서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다른 말로 말하면, 과학자의 자아(ego)와 물질적 욕구는 그가 어떻게 행동하는가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가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과학자들이란 과학적 연구에 대한 특별한 수준의 순수함 및 헌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사사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을 믿으려면 과학적 연구의 경제적 토대 혹은 과학자들의 역할에 관한 사회적 압력도 전혀 몰라야 할 뿐 아니라 거의 초인적 수준의 순진함이 필요하다.  


많은 과학자들이 객관적이고자 노력하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것이 그들이 실제로 객관적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반면에, 과학자들은 언론인들보다 객관성을 더 잘 주장할 수 있다. 많은 분야들에서, 과학자들은 그들의 지식이 실제로 쓸모가 있는가, 아닌가에 의해 제약을 받는다. 처방약이 효과가 날 수도, 안 날 수도 있다. 새 건축 재료 및 새 화학적 해결책이 효과가 나거나 효과가 없을 수 있다. 


따라서 많은 물상 과학자들은 그들이 발견한 것과 결론을 성공적으로 적용하는 것에 의해 자신들이 얼마나 편향들에 빠져들 것인가는 제약을 받는다(역주: 물상 과학자들이 잘못된 개인적 편향에 빠져잇는가의 여부는 과학적 검증 결과에 의해 확인되기 쉽기 때문이다). 


언론계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그런 견제 장치가 없으며, 그리하여 우리는 언론을 “과학적인”(scientific) 것이 되게 만들려는 리프만의 시도는 근본적인 결함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뉴스 스토리가 과학적으로 소통되었는가, 아닌가에 관한 실질적인 척도는 없다. 



언론인들도 객관성 확보가 불가능함을 점점 더 인정하고 있다 


트럼프에 대한 언론계의 깊고도 명백한 적대심으로 인해, 언론 매체들은 언론이 감정에 얽매이지 않은 과학적 조사라는 리프만 모델을 수용하고 있다고 계속 주장하기가 점차 어려워졌다. 


과학적 이상(ideal)에서 이렇게 벗어난 것이 과거 십년 동안 너무나 명백해졌기 때문에, 사실상 주류 언론계조차 이제 그 점을 공개적으로 논의하기 시작했다. 


예컨대, 2015년 롤링스톤(역주: Rolling Stone은 격주로 발행되는 미국의 대중문화 저널)지의 매트 태비(Matt Taibbi)는 “객관적 저널리즘이란 환상이다”는 특집 기사를 뉴욕 타임스에 썼다. 매트 태비는 ‘더 데일리 쇼’(역주: The Daily Show는 미국의 정치 풍자 방송 프로그램)에서 존 스튜어트가 은퇴하는 행사와 관련하여 글을 쓰고 있었는데 그는 스튜어트의 인기의 일부는 그가 객관적 언론인인 체하지 않았다는 점 때문에 설명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객관성이라는 외관 뒤에 숨는 대부분의 언론인들과는 달리, 스튜어트는 자신의 편향성에 대해 솔직하게 인정한 것이다.  


많은 언론인들이 아직도 이 점을 부인하지만, 언론 매체 소비자의 압도적 다수는 편향성이 만연하며, 그것은 모든 방향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리하여 태비는 이렇게 결론을 짓는다.


우리는 이제 사람들이 언론인의 기사를 믿을 것인가를 결정하기 전에 그걸 쓴 언론인이 누구인가를 먼저 알고 싶어 하는 사회 속에서 살고 있다. 


그럼에도 자신의 편향성을 숨기고자 애쓰는 건 독자들로부터 의심만 자초할 뿐이다.  


트럼프 정부에 대한 대중매체들의 대한 편향적 적대를 옹호하는 수단으로 ‘객관적 언론’이란 이상을 내세우는데서 벗어난 사람들도 있다. 이것이 “The Correspondent(역주: 롭 위언버그 등이 2013년에 설립한 네덜란드의 온라인 뉴스사이트)”사의 롭 위언버그(Rob Wijnberg)가 “어떤 입장을 취하지 않는 것(역주: 객관적 언론을 빙자하여 어느 쪽의 주장도 취하지 않는 것처럼 자처함을 의미)은 권력의 대변인일 뿐 아니라 거짓말로 빠져드는 통로라는 의미이다”고 결론을 내린 한 이유이다. 위언버거는 객관적 언론이라는 이상(ideal)을 포기하는데, 왜냐하면 그에게 그것은 악의 세력들을  너무 관대하게 보아주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악동(예컨대, 도널드 트럼프같은)들을 분명하게 반대하는 것이 ‘과학적 보도’라는 불가해한 이상 때문에 보도에 제약받는 것보다 더 낫기 때문이다. 


태비와 위언버그의 주장 논제가 무엇이었던 간에, 그들은 우리로 하여금 언론에서 객관성이 가능하다고 믿게 하려는 CNN이나 Foxnews사 토크 거물들보다 언론의 실제에 대해 훨씬 더 정직하다. 개인의 정치적 편향성이 무엇이든 간에, “우리는 보도한다. 결정은 당신들이 하라”(We Report. You Decide)는 구호에 관련된 여러 가지 주장들은 늘 환상(fantasy)에 바탕을 둔 것이다. 



프레임에 짜 맞추기(Framing) 및 의제 설정(Agenda-Setting)


지난 수 십 년간 정치학과들 및 매스미디어학과들에서 연구되어져 온 것들을 조금이라도 접해 본 사람들에게는 위 둘 중 어느 것도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의제 설정”(주제 지정) 및 “프레임에 짜 맞추기”와 같은 개념들은 미디어들이 어떻게 작동하는가에 관한 모든 진지한 학문들에 관한 오랜 특징이 되어 왔다. 이 두 행위의 관여 없이 언론에 관여하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 


언론인에게 하루에 여러 시간 및 자원이 주어져 있음을 감안하면, 뉴스기관들은 의제 설정을 하는 것이 불가피하다. 결국, 뉴스기관들은 모든 걸 보도할 수는 없으며, 따라서 보도될 것들을 결정해야 한다. 이것이 시청자 및 독자에게 어떤 이슈에 대해 무엇을 생각하라고 지시하는 것은 아님은 맞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시청자 및 독자에게 그들이 무엇에 관해 생각할 것인가를 지시한다. 만약 어떤 뉴스기관이 뮬러 조사보고서(역주: Mueller investigation. 미국 트럼프 대통령과 러시아 간의 대선 관련 연루를 조사한 2017-19년간의 특위조사 보고)에 관한 50개의 스토리를 가지고 있지만 미국 지원 하에 일어난 예멘 어린이들에 대한 폭격만을 다룬다면 그 미디어는 의제를 지정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에, 자원이 한정되어 있다는 것은 또 뉴스기관이 “프레임에 짜 맞추기”(framing)를 해야 한다는 것도 의미한다. 이것은 스토리의 초점과, 어떤 국면이 다루어지는가에 영향을 준다. 그것은 또한 어떤 이슈를 논의하기 위해 어떤 “전문가”(experts)가 필요한가에도 영향을 준다. 예컨대, 미디어가 대외정책을 보도하고 있다면, 군 조직의 편을 드는 경향이 있는 최근 퇴역한 군(軍) 인사를 출연시킴으로써 그 이슈의 프레임을 결정할 수 있다. 이것은 그 미디어가 전쟁에 반대하는 전문가들을 출연시켰을 경우와는 아주 다른 상황이 된다. 더욱이, 비록 그 미디어가 이 두 시각 간의 완벽한 균형을 이룰 수 있다 할지라도, 여전히 프레임에 짜 맞추기를 관여하고 있는 것이 될 수도 있다. 결국, 해석하고 분석한다는 두 가지 가능한 방식만을 담고 있는 이슈들은 거의 없다. 이 두 면만을 선택함으로써, 그 미디어는 다른 관점의 시각들을 중요하지 않거나 “극단적”(extreme)인 것으로 간주해 진지한 논의 영역 밖에 놓는다. 


늘 이렇게 되어 왔다. 객관적이고자 노력했던 언론인이 아무도 없었다는 말이 아니다. 그런 사람도 많았다. 그리고 자신들은 객관성을 이룩했다고 생각하는 언론인들이 많았다. 그러나 프레임에 짜 맞추기와 의제설정(의제지정)의 실제는 객관성을 갖고자 하는 사람들조차도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참으로, 여기의 진정한 스캔들은 많은 언론인들이 자신은 객관적이라 주장하면서도 자신의 완고한 이념적 편향성에 계속해서 빠져든다는 점이 아닐 것이다. 아마도 진정한 문제점은, 너무나 많은 미국인들이 그들이 미디어를 통해 얻는 정보들이 객관적이라거나 편향성이 없다는 생각을 즐기기까지 할 정도로 너무나 쉽게 속아왔다는 점일 것이다. 오늘날, 미국인들이 방송사들의 이브닝 뉴스를 보고는 “어이구, 정말 대단한데!’ 난 이제 세계의 사건들을 공정하고 순수하게 사실적으로 다시 알게 되었어!”라고 생각하며 돌아선 적이 진정 있었다고 믿기는 극히 어렵다. 월터 크롱카이트(역주:  Walter Leland Cronkite Jr. 미국 CBS 방송국에서 이브닝 뉴스 진행자로 명성을 날렸던 기자)의 시대에는 몇몇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다. 그런 날들은 이제 끝난 것 같다. 



글쓴이) Ryan McMaken

라이언 맥마켄은 현재 미제스 연구원의 선임 편집인이며 콜로라도 대학에서 경제학 및 정치학 학위를 받았고, 콜로라도 주정부의 주택부 이코노미스트로도 일했다. 『공산주의 카우보이들』의 저자이다.  


옮긴이) 김행범(부산대학교 교수)


원문) https://mises.org/wire/objective-journalism-has-always-been-my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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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헌님의 댓글

김도헌 작성일

1.객관성이라는 것은 반증 가능성이 있는 범위내에서의 객관성일 뿐이며 아무리 과학적 방법과 지식을 강조해도 카를 포퍼가 말하는 반증 가능성이 남아 있는 과학적인 방법과 지식일 뿐이다.

2.질서 자유주의의 선구자인 빌헬름 뢰프케에 의하면 객관성을 담보한다거나 객관적이라고 말하고 주장하는것에도 그곳에는 객관성이라는 인간의 주관적인 가치가 개입되어 있다고 한다.

3.나의 생각으로는 인간의 객관성의 담보라는 것은 모든 주관적 가치의 간주관성 즉. 모든 주관성에 걸쳐 있는 공통된 가치가  객관성이라고 생각한다.

4.즉. 간주관성이 객관성을 확보한다고 말하지만 그것 역시 주관적인 생각에 걸쳐진 공통된 주관성에 다름  아니다.

5.인간이 신이 아닌 이상에는 결코 무너뜨릴수 없는ㅇ객관성의 확보는 아직 드러나지 않는 주관성이며 역사적인 시험을 견뎌야 하는 임무가 숨어져 있다.

6.그래서 아무리 방송이나 저널리즘에서 객관성을 가졌다 해도 시간의 테스트를 거쳐서 비판적 사고에 직면하면 무너져 내릴 객관성의 임의성일  뿐이다.

7.신문 방송에서 객관성을 운운할때에도 그들은 간주관성에서 있을 뿐이거나 반증을 기다리는 처지에서ㅇ벗어나지 못하는 처지에 있음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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